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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신상목

어빈2 2021. 10. 2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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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상목
평점 7

개요

이 책은 일본 에도시대의 생활사를 다룬 책이다.

문제의식은 이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과 일본이 근대화의 절벽에서 일본은 성공하고 조선은 고꾸라진 것으로 아는데, 이는 틀렸다는 것이다.

응? 조선은 고꾸라진게 맞지않나? 이 책에 따르면 아니다. 조선은 애초에 근대화에 도전할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서로 동일한 입장에서 동일한 근대화 요구를 받았는데 일본이 성공하고 조선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일본은 에도시대 260년 동안 근대화의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본은 에도시대 260년을 통해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전환과 축적의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에 변화의 순간이 왔을 때 메이지유신을 통해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용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를 준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챕터를 소개하고 그 중에서 마음에 와닿은 느낌을 붙여 설명하는 형식으로 '내용'파트를 채우려고 한다.

1장은 소바집을 다루면서 에도의 발전상을 설명한다. 1789년 창업한 소바집이 아직도 도쿄에 있다고 하는데, 소바에 필수적인 깨끗한 물을 어떻게 당시 바다 매립지였던 에도에서 구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에도의 치수사업을 다룬다. 또한 소바집이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광고지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에도 사람들의 관광, 쇼핑 문화를 언급한다.

마지막으론 소바집의 규모가 커지면서 어떻게 돈과 직원을 관리했는지를 언급하는데 이를통해 1장에서 도시 거주자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즉 농업이 아닌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어떻게 돈을 벌고 이를 통해 소비생활을 했는지 보여준다.

사실 일반 서민계급들이 자유롭게 도시의 문화를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농민에서 노동자로 바뀌어가는 모습은 일본 근세시대에 근대화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엿보인다.

2장은 본격적으로 에도의 치수작업을 다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험하다 판단했고 그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당시 불모지에 가깝던 에도로 이에야스의 봉토를 이전하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에도는 당시만해도 습지에 침수가 빈번했던 곳인데, 이는 지금 도쿄의 도시 대부분이 매립지로 되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에도는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여 동서를 연결하는 허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컸는데, 이는 오로지 자연을 극복하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했다. 결국 맑은 물을 에도 북쪽에서 가져올 수 있는 수로를 파고, 많은 땅을 매립하는데 성공하면서 에도는 수도가 되기에 적합한 곳이 될 준비를 마치게 된다.

치수와 매립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데 이에야스는 어떻게 그 돈과 노동력을 마련했을까? 저자는 천하보청(天下普請)과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를 설명한다.

천하보청은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를 말한다. 일본의 봉건제는 쇼군과 다이묘 간에 느슨한 관계를 전제로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했는데, 때문에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걷는 등 통제권이 약했다. 다이묘는 전쟁 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을 갖고 있었다.

이 군역을 연장해석하여 성곽과 축성, 제방, 도로 건설 등에 다이묘의 인력과 자재를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과한 것이 천하보청이다.

3장은 참근교대제를 설명한다. 참근교대제는 1년을 단위로 각 번의 번주를 정기적으로 에도로 출부시켜 머물게하는 일종의 인질제도다. 근데 이게 쉽지가 않은게 일본은 국토 규모가 크지 않지만 길이가 상당히 길다. 큐슈 남쪽에 있는 사쓰마 번에서 에도까지 올 때 그 길이는 1600km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 길을 번주 혼자만 오는 것이 아니라 큰 행렬이 같이 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에도로 향하는 가도, 즉 인프라가 좋아지고 그 길 주변의 여객업 등 경제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다이묘가 에도로 오는 동안 쓴 돈은 지방 도시의 상인 및 노동자 계층에게 흡수되면서 일본 에도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조닌(서민)계층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에도로 정보와 물자, 인원이 집중되고 그것들이 지방으로 다시 분산되는, 이를 통해 전근대를 벗어나는 수준의 시장과 자본의 원리가 작동하였다고 한다. 참근교대제 때문에 에도에 지식이 모이게 되고 이는 '일본'을 공통분모로 하는 민족의식이 싹트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참근교대제나 천하보청이 이 모든 것들을 의도하고 행해진게 아니라는 것이다. 교환과 통상이 활발히 일어날 때 이를 규제하지 않고 인간 본연의 행동에 맡긴다면,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자생적 질서가 형성된다는 것이 에도시대에 잘 증명되고 있다.

4장은 미소(일본 된장)을 통해 에도시대에 퍼졌던 경쟁과 자율성을 설명한다. 전국시대 미소가 중요한 전투식량이 되면서 보다 좋은 미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소를 만들던 지역들은 에도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인프라를 통해 전국적인 규모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고 각 지역들이 번과 번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문화가 생성됐다고 한다. 또한 각 막부는 상당수준의 자치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개성있는 미소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5장은 여행에 대해 다룬다. 이 부분이 상당히 놀라움을 안겨줬었는데, 지금도 북한과 중국을 보면 농민들은 토지에 귀속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인데, 일본도 에도 초기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들어서는 전 국민이 여행을 하는 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졌다고 한다.

특히 이세신궁(일본 건국신화의 상징)을 참배하는 순례여행이 굉장히 일반적이었고, 처음에는 여행을 막던 일본 막부도 서민층의 여행 욕구를 인정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여행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참근교대제를 통한 도로망의 정비였는데, 당시 도호쿠 지방 사람의 참배여행 기록을 보면 이세신궁을 들렀다가 나라, 아스카, 교토, 오사카 등 명소를 돌아보고 오는 3~6개월 정도의 장기여행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여행이 가능하려면 민중들이 농번기 외에 돈과 시간을 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함을 뜻하는데, 이는 18세기가 되면 일본의 서민층도 여유자금을 갖고 소비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매년 수만~수십만의 소비층의 여행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숙박산업도 발달시켰는데, 전세계사람들이 감탄하고 좋아하는 료칸(旅館)도 이때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6장은 출판에 대해 다룬다. 이 부분도 여행처럼 상당히 놀라운 내용을 담고있다.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문화는 유럽, 중국, 조선에 비해 뒤쳐져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17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연간 1천여 종의 신간이 서점에 쏟아져 나오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거의 모든 국민이 책을 일상생활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역사서, 경전, 불서, 의서 등 소위 '재미없는'책들을 간행하는데 그쳤으나, 1682년 이하라 사이카쿠의 <호색일대남>이라는 포르노가 대박을 치면서 책이 오락물로서 바뀌기 시작한다. 이후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에도를 중심으로 그림과 텍스트가 가미된 대중오락서적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이를 일본 '망가'의 원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한다.

놀라운 것은 서민층까지 글을 읽고 쓸줄 알았다는 것인데, 오늘날에도 문해율 70~80%를 보통으로 보는 마당에 19세기 초 에도 인구의 70%정도가 글을 읽고 쓸줄 알았다는 것은 심각하게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책이 대중화되는것과 발맞춰 '데라코야'라는 서민 사교육기관도 발달하게 되는데,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돈만 있으면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글 뿐아니라 산수, 주판, 실용기술, 간단한 유교경전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줄 알게되면서 지식교양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게 되는데, 19세기 초 일본의 베스트셀러는 <경전여사>라는 유교경전 해설서라고 한다. 기득권만이 누리던 지식이 대중화가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베스트셀러 꼬라지를 보면 왜 일본과 한국의 노벨상 갯수가 차이나는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출판이 거대한 산업이 되면서 '판권'에 대한 개념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고, 판권은 소유/양도가 가능한 재산권으로 인정되었는데, 저작권의 개념이 자생적으로 탄생했다는 이런 부분이 근대화의 물결에 마주쳤을 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일본 근세의 자생적 질서라고 할 수 있다.

6장의 마지막엔 대본업도 다루고 있다. 대본업은 일종의 책 대여점인데, 책이 고가이다보니 책을 빌려주는 산업도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도시대 출판문화는 철저하게 시장의 원리를 따랐고, 이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시장경제의 질서가 탄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서민 계층까지 문자를 읽고 쓸줄알게되는 지식의 대중화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은 일본 저력의 원동력이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7장은 6장에 이어 교육에 대해 다룬다. 1848년 일본 최초의 원어민 영어교사인 래널드 맥도널드는 그의 <일본회상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 모든 계급의 남녀, 아이들이 종이와 붓과 먹을 휴대하고 다니며 곁에 두고있다.

모든 사람이 읽기와 쓰기 교육을 받고 있다.

번교는 무사계급인 번사들의 자제를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이다. 일본은 번의 자치권이 보장되어있다보니, 각 번에 맞는 학문을 번주가 정하여 번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쓰마 번의 경우 위치가 중국, 조선과 가깝다보니 유럽의 등장으로 대륙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빨리 알아채고 서양 학문을 번교에서 가르치는 등 차별화 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 막부가 자체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도 존재하였는데, 여기서는 네덜란드어를 중심으로 금속공학, 기계학, 물산학, 수학 등을 가르쳤으며, 1861년에는 서양의학 전문기관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6장에 나왔던 서민교육기관 데라코야 뿐만 아니라 '주쿠'도 설명한다.

주쿠는 학식과 명망이 높은 지식인들이 개인적으로 문하생을 모집하여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데라코야와 주쿠 모두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주쿠의 경우 굉장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유신을 주도하였던 지식인들이 주쿠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교육이 산업화가 되어 능력있는 지식인들은 가르치는 일만 가지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8장은 신문에 대해 다룬다.

일본은 지금도 신문 대국인데, 전세계 신문발행부수를 조사해보면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일본경제신문 등은 꼭 순위안에 들어간다.

요미우리(讀賣)는 원래 판매자가 큰 소리로 내용을 읽으면서 가두판매를 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요미우리는 1615년 도쿠가와와 도요토미의 최후 결전을 다룬 <대판안부지합전지도>라고 한다. 오늘날 신문처럼 전문성을 갖고있진 않지만, 대중의 관심사에 대한 정보를 취재하고 취합하여 전달하는 매커니즘이 있었던 것이다.

광고지 또한 발달했는데, 1683년 에치고야 포목점은 매출증대를 위해 대중을 상대로 히키후다(광고지)를 발행했으며 대박을 쳤다고한다. 경품을 준다던가, 대량으로 구매하면 할인을 해주는 등 오늘날과 별로 다를게 없는 상행위가 17세기 일본에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당대 유명 작가들을 고용해 히키후다의 제작을 의뢰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광고기법이 연상될만큼 놀랍다.

여기서 요미우리와 히키후다가 결합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신문+광고지가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그때그때 일어나는 전국 단위의 또는 지역 단위의 일들을 취재하고 발행하며, 이를 광고와 결합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민간 주도의 신문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에도시대 일본이 높은 수준의 전국단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9장은 <해체신서>를 통해 에도시대 지식/과학혁명을 다루고 있다.

<해체신서>는 1774년 발간된 일본 최초의 번역된 서양 책이다. 1771년 <타펠 아나토미아>라는 해부학 책이 일본에 들어오게 되고 동양 삼국이 모두 그렇듯 해부를 터부시하던 일본의 한의사들이 이를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의사 몇명이 의기투합하여 네덜란드어 사전도 없던 시절이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1774년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출간된다.

이는 일본의 지식사의 분기점이라고 평가받는데, 즉 동양에는 없는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면서 새롭게 들어온 개념들이 지식사회를 흔들었고, 일본에서 터부시되던 인체 해부라는 금단의 영역을 넘어서면서 과학적 사고방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때 해체신서를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단어들이 신경, 연골, 동맥 등이라고 한다.

9장에서는 아픈 얘기도 나오는데,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 통신사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1764년 조선의사 남두민은 일본 의사의 해부실험에 대해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고 꾸짖었다 한다. 100년뒤인 1881년 조선관료 송헌빈은 해부도와 해부용 인형등을 보고 "정말로 끔찍하다. 인술(仁術)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적었다한다.

즉, 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에 눈을 뜨고 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10장은 지도에 대해 다룬다.

이노는 상인으로 거부를 쌓고 50세에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한다. 그는 평소에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하기 위해 에도에 가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의 과학자들은 네덜란드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지구의 크기를 정확하게 알지못해 자오선 1도의 거리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이노는 "지구상 두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북극성이 관찰되는 각도를 측정한다. 두 각도의 차를 비교하면 위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측정지점 간의 거리를 정확히 알면 위도의 차이를 대입하여 지구의 둘레를 계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을 하려면 관측지점간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야했다. 때마침 러시아의 등장으로 훗카이도 상황에 신경쓰고 있던 막부는 훗카이도의 정확한 지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충분히 먼 지점이 필요했던 이노가 막부의 허가를 받아 훗카이도의 측량을 시작한다. 6개월간의 측량끝에 너무나 완벽한 지도를 만든 이노를 막부는 크게 치하하고 아예 일본 전체에 대한 지도 제작을 이노에게 의뢰하게 된다.

이노는 50살에 천문학공부를 시작하여 55세에 훗카이도 지도를 만들었으며, 71세가 되던 해 10차 측량까지 마치며 그동안 모은 데이터를 집대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818년 73세 노환으로 이노는 지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고 그의 제자들이 3년 뒤 <대일본연해여지전도>를 완성하여 막부에 바치게 된다.

위성지도와 비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정확한 지도가 완성되었고, 이는 당대 일본 최고의 과학지식이 동원되어 만들어졌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에도시대 수 많은 토목공사 등을 통해 일반인들도 어느정도 접할 수 있는 수준의 측량기술이 발달해있었고, 동양의 세계에 대한 인식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좌표와 위경도의 개념도입에 거부감이 없는, 과학적 사고방식 덕분이었다.

11장은 사전에 대해 다룬다.

<해체신서>의 발간 이후 일본 지식인들은 사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된다. <해체신서>는 네덜란드 말을 사전 없이 번역한 것으로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경우 네덜란드 자국어 사전이 없었고, 네덜란드-프랑스어 사전이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일본 지식인들은 네덜란드-프랑스어 사전을 가지고 네덜란드-일본어 사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사전을 만드는게 중요한 이유는 서양의 개념을 동양으로 이식하기 위한 지식의 집약과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도 소개되어있지만 이를 '화제한어'라고 부른다.

화제한어에 대하여

최근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학교에서 교가를 바꾸라는 둥 이상한 얘기가 오고간다. 여기에 대해 경향신문에 좋은 칼럼이 올라왔다. [역사와 현실] ‘민족’과 ‘자유’도 일제 잔재?

irvine0212.tistory.com

이는 서양의 개념을 수용한 후 자국어로 바꾸는 재창조작업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이 집약되고 새로운 단어를 뽑아내는 고도의 지적역량도 요구된다. 이를통해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쉬워졌다.

12장은 섬유산업에 대해 다루고 있다.

면은 14세기 중국, 15세기 조선, 16세기 일본에 보급된다. 일본은 조선보다 100년이나 늦게 보급되었지만 17세기 이후 면 산업이 폭발하게 된다.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 일본에서 면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농가들이 증가했는데, 이는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쌀을 생산하는, 즉 자기가 소비하려고 작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키운 작물을 판매하고 받은 소득으로 쌀을 사먹는,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필연히 교환의 매개인 화폐의 발달을 가져오며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자본주의의 맹아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농촌에서도 자본이 축적되었으며 보다 질 높은 면화를 생산하기 위해 분업과 전문화가 진행되었다.

면화가 보급되고 고급 면화 수요가 늘자 자연스럽게 염색산업도 발달하게 된다.

13장은 염색을 중심으로 한 패션 '이키'문화를 다룬다.

고급 옷감과 아름다운 옷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염색 산업이 발달하였다. 조선의 경우 염색을 규제하여 모든 국민이 흰 옷만 입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일본도 염색을 규제했다고 한다. 근데 일본은 모든 염색을 규제한것이 아니라 쥐색, 차색, 남색 3가지만 허가하는 규제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쥐색, 차색, 남색 3가지 색의 온갖 변화와 그라데이션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같은 색이어도 색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일본엔 이 세가지 색깔에 대한 단어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이 단어들은 대응하는 한국어조차 없다. 예를들어 에도차이로는 살짝 붉은기를 띠는 발랄한 차색, 리큐차이로는 노란 기가 감도는 차분한 차색 등이다.

이런것을 보면 왜 지금도 일본에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존재하는지 그 기원을 알수있게 한다.

재밌는게 한글에 대해 국뽕을 주장하는 바보들이 하는 소리가, 너희는 이런거 없지? 하면서 노란색에 대해 누런, 노르스름한 등을 떠들면서 마치 다양한 표현을 갖고 있는 한글이 대단한것 처럼 설명한다는 것이다.

근데 어떤 현상이 인식되면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생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이는 그전까지 '민족'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하나의 색, 즉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로 불렀다는 것은 색깔도 톤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에 대응하는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음을 뜻한다.

일본은 적어도 3색에 대해서는 한글로 대응할 말이 없을 정도로 색에 대한 개념 구분과 그에 상응하는 단어가 있다는 데에서 문화의 깊음을 보여준다.

14~15장은 도자기를 다룬다.
14장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삼평을 중심으로 일본의 도자기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설명한다. 일본은 도기만 만들 수 있었지만 일본으로 넘어간 도공들에 의해 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이마리야키'라는 고유의 일본 도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15장은 일본 정부가 주체적으로 일본의 도자기를 수출 상품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외 판로를 뚫었는지를 중심으로 '예술 후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외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 일본관을 따로 열어 도자기를 전시하는 등 노력했고 '예술 후원'이 단순한 지배자 개인의 취미가 아닌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됐으나,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해 도자기가 도태됐음을 지적한다.

16장은 지식과 상인정신을 다룬다.

답답하고 고착화된 지식을 갈구하는 것이 아닌 일본의 무가들은 실용적이고 융통성있는 지식을 선호하였고, 이런 방식이 놀랍게도 절대적 진리화가 되어가는 분야에 거침없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만들었다. 예를들어 조선의 경우 성리학이 하나의 종교 탈레반화되어서 반론은 모조리 묵살하였지만,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주자학을 근본으로 삼았더라도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날서게 등장했다 한다.

16장에서 심각하게 놀라운 것은 자생적 상업주의의 발견이다.

일본 또한 주자학의 사농공상 세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상인들도 자신들의 직업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시다 바이간이라는 상인이 경험을 통해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널리 설파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대중적 교육을 했고 그 결과 신용을 중시하고 가업을 소중히하며, 고객 만족을 위해 정직과 친절을 실천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교훈이 에도시대 상당히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오미 지방 출신 상인들의 산포요시 정신인데, 이는 '파는 쪽도 좋고 사는 쪽도 좋고, 세상도 좋고'라는 뜻이다.

이게 바로 아담 스미스가 한 말이 아닌가? 상업의 결과가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회의 후생을 증진시킨다는 그의 논리가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맹아다.

17장은 화폐 통일을 다룬다.

각 지방별로 중구난방 사용되던 화폐가 에도시대 들어 하나로 통일되고 17세기 중반이 되면 일본사회 전국저긍로 모든 거래가 화폐 결제를 기본으로 하는 화폐경제가 성립된다고 한다. 조선의 경우 '돈을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폐경제가 정착되지 못한 채 세금을 내기 위한 용도로 동전을 구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것에 비하면 대단한 사회 발전이라 할 수 있다.

18장은 화폐 통일을 기초하여 일본 상품경제의 발달과 재벌을 등장을 그린다. 지금도 유명한 미쓰이와 스미토모가 이 때 등장했다 하고, 이는 전적으로 상업세력의 자율적, 창의적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에필로그는 다시한번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일본이 에도시대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했는지 언급한다. 이 부분에서 특히 놀라웠던 것은 서양 세력과의 조우에 있었던 불평등 조약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반응이다.

우리는 지금도 서양의 불평등 조약에 대해 분개하면서 '서양 나쁜놈'이라는 데에서 모든 생각과 논의를 마친다. 반면 일본의 경우 서양에 의한 불평등 조약이 일본 스스로가 민법 등 사법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서양의 신뢰를 얻지 못했음을 원인으로 삼고, 수 년간 미국 유학 등을 통해 일본의 근대 법체계를 세우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헌법과 민법 등을 만들고 난 다음, 당당하게 서양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요구했고, 실제로 뜻을 관철시켜 조약을 수정했다고 한다.

남탓과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 하는것. 결과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하고 준비한 자가 운명을 바꿨다.


느낀점

보면 볼수록 자괴감이 드는 책이라고 해야겠다.

근대화의 정의를 사적 자치로서의 개인의 탄생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이에 파생되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라고 본다면 일본은 근세를 지나는 동안 이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소름끼쳤던게, 조선이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을거라는 주장들을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 말은 오히려 일본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크게 느꼈던 파트가 일본 주자학의 관념론이 무너지고 '상인'계급이 대두되는 부분이었다. 일본의 상인들도 조선의 사농공상처럼 반상의 분에 갖혀 살았고, 상자신의 업(業)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상인 또한 도(道)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만들어냈고 이는 '파는 사람도 이익, 사는 사람도 이익, 사회도 이익'이라는 상인의 도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바로 아담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 아닌가?

반면 조선은 무엇이 있었는가?

개혁군주라는 정조도 사대주의에 찌들은 전근대적 군주였고, 교과서에서 보는 고종의 광무개혁도 까고보면 아무런 개혁이 없는 전근대성의 다시 강조에 다름아니다.

일제시대를 욕하면서, 그것이 식민사관이라 떠들면서 일제시대 전 조선에도 자본주의의 맹아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까고보면 오히려 퇴행적이다. 자본주의의 맹아는 적어도 백년, 평균적으로 2~3백년을 걸쳐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고, 지금 한국에 그 전통이 없기 때문에 정신문화가 뒤쳐져있는 것이라고도 진단할 수 있다.

이 책은 읽기 편하고 가벼운 책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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