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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좁은 문- 앙드레 지드

어빈2 2021. 10. 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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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앙드레 지드
평점 7

개요
이 책은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지드가 1909년 발표한 소설로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제롬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이 책은 알리사 신앙의 성장 소설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트 1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 이야기다. 파트 2는 제롬의 시점에서 공개하는 알리사의 일기다. 파트 3은 아주 짧은 에필로그라 할 수 있다.

내용
주인공 제롬은 사촌누이 알리사를 사랑한다. 어렸을 때 부터 뭔가 조숙해보이는 알리사가 눈에 들어왔고 알리사도 제롬의 마음을 받아들여 서로 사랑하게 된다. 제롬의 삼촌이자 알리사의 아버지인 뷔클랭도 둘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고 친척들도 언젠가 둘이 결혼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제롬과 알리사 사이에는 긴장감 같은 것이 있는데, 제롬은 이를 어렴풋이만 이해한다. 그래서 약혼을 하려고 하나 알리사의 거절로 약혼하지 못한다.

여러 에피소드가 지나는 동안(세월도 함께 지난다)제롬은 한결같이, 끊임없이 알리사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나, 오히려 알리사는 점점 제롬을 멀리한다.

3년이 지나 결국 마지막 만남에서 너무나 변해버린 알리사와 작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리사의 부고 소식과 알리사의 일기장을 유언으로 받게 된다.

알리사의 일기는 수 년간 알리사의 신앙과 제롬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승화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롬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알리사와 제롬이 결혼하여 함께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책의 표현에 따르면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제롬을 위해 알리사가 떠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천상의 사랑이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욱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브리 11장 40절).


느낀점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지고지순한 신앙심을, 누군가에게는 극단적 기독교 문명의 아픔을 보여준다. 내 경우엔 둘 다 느껴졌다.

이 시절 서양 지식인들이 항용 보여주는 태도는 거의 서양 사람들의 DNA에 박혀있는 기독교 문화 또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는 지식인 스스로가 기독교가 자체를 증오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인들이 더 영성이 깊은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눈에 비치는 그 시대의 기독교 타락을 비판하는 것이지 오히려 초기 기독교가 추구하던 순수성, 영성을 훨씬 소중히 여기고 좇는 경우가 있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이 강하다. 작가는 알리사를 통해 역자의 말대로 천상적 금욕주의(내가 볼 땐 금욕주의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살인적 확신범에 가까운 모습을 폭로하는 것 같지만, 알리사가 추구하는 숭고함 자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 본인이 기독교가 갖고있는 인류 보편의 숭고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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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핵심 개념인 '좁은 문'은 무엇일까? 좁은 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리사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책 초반에 제롬이 알리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예배 도중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오 복음 7장 13절-14절)의 설교를 들으면서, 동시에 설교를 듣고 있는 알리사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처음 등장한다.

이 때 제롬은 자신이 알리사라는 여자아이를 평생 사랑하고 자신이 지켜줘야한다는 것을 다짐하면서 이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 '좁은 문'인것 처럼 해석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고 제롬의 입장에서는 '좁은 문'이 알리사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한 문이 아니다. 신앙적 의미의 생명이라 함은 세속에서 어떤 고귀한 가치를 지켰을 때 비로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여기서 생명은 세속에서의 희생으로 치환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영화 <콘스탄틴>을 보면 콘스탄틴은 지옥으로 가게 될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에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여자 주인공을 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생명의 '좁은 문'으로 가게 되는것이다.

콘스탄틴의 유명한 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소리긴 하지만 어떤 목표(예를 들어 비싼 집을 사거나)를 향해 가는데 있어서의 험준함을 뜻하는게 아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좁은 문'은 알리사가 추가해가려고 했던 가치이며, 결국 알리사는 '좁은 문'을 들어가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지금의 관점에서, 특히 동양인에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가는, 고구마를 몇개를 먹은듯한 답답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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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의 대사와 일기를 통해 알리사가 갖고 있는 신앙, 사랑, 그리고 제롬을 끝까지 멀리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우리가 잘못 이해하지나 않았나 걱정하던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날거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욱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브리 11장 40절) '"

"그 말을 항상 믿고 있어?"

"믿어야 해"
p 158

아마도 그것은 이 행복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너무나 쉽사리 얻어졌고 또 너무나 빈틈없이 '들어맞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죄고 질식시킨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이 행복 그 자체인지 혹은 행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인지 스스로 묻고 있다.

오오 주여!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은 제게서 멀리해 주소서!
p 168

신성한 기쁨이란 하느님 안에서의 융합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끊임없이 하느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 169

아니야, 제롬, 아니야. 우리가 덕을 행하는 것은 미래에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야. 우리의 사랑이 찾고 있는 것은 보상이 아니야.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스스로의 고행에 대한 보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욕이야. 이러한 영혼에 대해서는 덕이란 장식품이 아니야. 그것은 이러한 영혼이 지니는 아름다움이야.
p 170


알리사는 자신과 제롬의 사랑이 신의 뜻에 부합하길 바랐으며, 그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기를 바랐다. 알리사가 동생 쥘리에트의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보면, 못생겼지만 돈 잘벌고 착한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탄하게 사는 삶 속에서의 행복은 아무런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이라 생각하며 이는 하느님과 동떨어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하느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으로서의 사랑'이 값진 것이라 생각하고, 이는 자신과 제롬의 영혼이 순수하게 대가 없는 덕과 사랑을 할 때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만큼 사랑하니까 너도 이만큼 해달라거나, 약혼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려거나, 사랑하니까 결혼해야한다는 세속적 의미의 구속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야 제롬. 이제는 늦었어.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엿보게 되었을 때부터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너의 덕택으로 내 꿈은 그처럼 높이높이 올라갔고 따라서 이제는 인간 세상의어떤 충족감도 그것을 손상시키진 못할 거야.
p 157

말씀해 주소서, 오, 하느님! 어느 영혼이 그의 영혼보다 당신께 더 합당하겠습니까? 그는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좀더 훌륭한 것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그가 저로인해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저는 그만큼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옵니까? 영웅적일 수 있는 모든 것이 행복 속에서는 얼마나 위축되고 있습니까!
p 174


알리사의 대사를 통해서, 또한 제롬의 독백을 통해서 알리사가 제롬과 함께 함으로써 높은 단계로 성장했다는 비유가 나온다. 왜냐하면 알리사가 제롬의 사랑을 알아차렸을 때, 그 순수하고 숭고한 제롬의 사랑으로부터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알리사도 그것을 알고 있는데, 성장하게 되면서 알리사는 둘의 사랑을 통해 인간의 사랑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음을 '엿보게' 되었다.

동시에 알리사는 자신을 한단계 높혀주는 제롬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 때문에 정체되고 더 나아가지 못함을 슬퍼한다. 바로 그것이 알리사가 약혼도 거절하고, 결혼도 거절하며, 같이 있는 것 조차 나중에는 거절하게되는 이유다. 제롬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이 존재한다면 그것 자체로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사랑의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의 형태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세속의 수준에서 둘의 사랑이 확인되고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알리사가 추구하는 '좁은 문'이 아닌 멸망의 문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리사는 끊임없이 제롬에 대한 사랑을 고백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멀어지려고 하는데, 결국 최종적으로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는 해결책은 제롬을 위해 자신이 없어진다는데 다다른다. 그것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희생이며, 알리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것을 예비하셨는즉'의 의미다.

제롬이 보다 높은 수준의 덕에 이를 수 있는 길에 자신과의 세속적 사랑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고, 알리사 스스로가 자신을 희생하여 더 이상 제롬이 정체되지 않도록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좁은 문'에 들어서는 길이자, 하느님이 둘을 위하여 더 좋은것을 예비한 것이며, 알리사 본인도 신앙 속에서 제롬과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길이었던 것이다.

주여, 저 자신은 이미 도달할 수 없어 단념해 버린 덕의 정상에까지 그만이라도 밀어올리려고 미친 듯이 갈망했던 이 마음의 어설픈 표현을 때때로 그가 일기장 속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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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가 죽는다는 점에서 기독교 문명에 대한 쓰라린 비판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같이 뿌리에 기독교 문명이 박혀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서양 사람들이 현대에 들어서 왜 기독교를 거부하는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떤 인간이 누군가를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 신앙의 결과라면, 그리고 그것이 신앙 안에서 추구해야 하는 사랑의 형태라면, 과연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리사의 행동은 결국 알리사의 죽음 이후 제롬이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저주이기도 하다.

소설 <금각사>의 주제는 책의 문장대로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면서, 다른 한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다. 한 손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사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더듬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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