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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어빈2 2024. 4. 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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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2
저자 마이클 샌델
 
 

개요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마이클 샌델이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돌아왔다. 하버드대학교 교수인 센댈은 '정의' 담론을 가지고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줬으며, 동시에 사놓고 읽지 않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이라는 한국인의 독서 실태를 증명해준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기존 샌델의 반시장주의적 관점을 확대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작들에서 시장이 침범할 수 없는 도덕적인 영역이 있다는 명제 하에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를 우리에게 소개해줬었는데, 잘 먹히지 않았다 여겼을까, 이젠 더 나아가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성공을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내용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9장으로 이뤄져있다.

서론
부정입시 사례를 소개하면서 왜 부정을 저지르면서까지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경쟁사회가 되었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명문대학 간판을 달려고 하는 것 자체가 대학이 능력주의의 첨병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1장 승자와 패자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의 예를 들면서 능력주의적 시장경제가 불평등을 확대했고, 불평등의 원인이 능력주의 즉,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가난해졌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노동자 계층의 포퓰리즘적 반동이 발생했다고 진단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엘리트들의 오만이 가난한 자들의 분노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도덕 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장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기독교, 특히 개신교 칼뱅주의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능력주의에 친화적인 전통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한다.

3장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대처와 레이건 시절에 사회적 지위 상승 담론이 능력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짧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 결과 포퓰리즘의 반격이 시작됐다고 한다.

4장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학력이 왜 능력주의의 간판이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5장 성공의 윤리
본격적으로 이론의 영역에서 능력주의의 어두운 점을 분석한다.

두 가지 관점을 빌려와서 설명하는데, 하나는 하이에크의 관점, 다른 하나는 롤즈의 관점이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부족한 점이 있고, 성공에 운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6장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4장의 학력주의에 이어 대학에서 더욱 더 공고해지는 능력주의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샌델 스스로의 답으로 제비뽑기 입시를 제시하기도 한다.

7장 일의 존엄성
금융, 부동산 등의 투기 자본 이득(샌델의 표현으론 사회에 기여하는게 없는 소득들)이 근로소득을 아득히 넘어서서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일의 존엄성을 되살릴 수 있는지 공화당과 민주당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엘리트들은 겸손해질 필요가 있고 공동선을 위한 공동체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느낀점


할 말이 너무 많은 책이라 사실 후기를 쓰는것도 일인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이은 샌델의 책은 그 앞 두책과 마찬가지로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이 책은 공허함이 훨씬 심했는데,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내내 주장해왔던 '공동선을 위한 공동체의 연대'와 엘리트의 '겸손'을 내세우는 것은 지적 게으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개신교의 칼뱅주의가 자본주의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언급하면서 개신교가 퍼뜨린 능력주의를 비판하는데, 그의 해결책이야말로 종교가 매번 강조하던것 아닌가? 바로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 말이다.

막말로 하느님이 창조주로서 세상을 만들었으니,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성공, 행복 등은 모두 하느님이 주관하신다는 종교의 관점은 샌델이 말하는 엘리트의 '겸손'과 별로 다를게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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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성공을 돈을 많이 번 것과 동일시 하고있는데, 샌델의 담론에서 아쉬운 부분은 행복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각자 다르겠지만, 어쨋든 인간은 행복한 상태를 원한다. 그럼 샌델이 말하는 성공은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샌델이 비판하는 성공과 불평등은 물질의 영역이라 거기에 행복이 들어갈 여지는 없어보인다. 그리고 보통 돈이 있을수록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만 어느정도 소득을 넘어서면 돈과 행복의 직접적인 관계도가 낮아진다.

문제는 그럼에도 돈을 미친듯이 더 벌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불평등은 거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성공과 불평등이 행복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담스미스 말마따나 적당한 소득이 있다면 행복은 주관의 영역이기에 불평등이 심화되거나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면 성공과 불평등을 비판할 동기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행복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약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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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샌델은 분명히 앵거스 디턴을 염두해두고 있다. 그의 통계를 인용하고있을 뿐 아니라 그의 책 <위대한 탈출>의 '탈출'이란 말을 인용하는데, 문제는 디턴의 <위대한 탈출>은 불평등의 긍정적인 면을 탐구한 책이다.

이처럼 불평등에 대한 관점은 여럿이라 이를 샌델처럼 절대악으로 볼 것인가는 그 자체로 논쟁의 대상이다.

현존하는 불평등의 원인은 1. 여성의 사회진출 2. 저출산 3. 고령화 4. 신혼부부간의 격차로 볼 수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질수록 쌍벌이가 많아지고 외벌이보다 격차는 누계로 커진다. 특히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은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애들끼리 결혼하면 가구 소득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상위에 들어간다.

그런 애들이 아이는 한명 만 낳는데 여럿일 때 보다 한명이 상속받으면서 부의 세습이 커진다. 또한 수명이 늘어나면서 능력있는 전문직 등은 은퇴이후 소득이 계속 있음으로서 격차가 커진다.

이처럼 현재 불평등이 하나의 사회 현상이고 이를 시정하는 일은 사실상 반동이다. 여자들 집에 들어가서 애나 보라고 할건가? 아니라면 불평등을 무조건 나쁘게 봐야될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논리는 로버트 노직의 말에서도 그 개념을 빌려올 수 있는데, 1. 여성이 인간임을 회복하여 남자와 똑같이 자유로운 사회생활의 기회를 찾는다 2. 열심히 일을 한다 3.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번다. 4.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5.아이를 하나만 낳아 인생을 아이에게 올인하지 않는다.

마지막 5번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1-5는 미덕이고 불의한 일이 아니다. 미덕이 더해졌는데 어떻게 그 결과가 불의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즉, 소득의 과정에 불의가 없다면, 결과로서 분배는 정의로운 것이지, 왜 분배에서 불의를 가정하냐는 논리다.

애초에 평등은 종교적 관점이고 각자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던간에 신과 개인의 거리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게 그 출발이라면, 정신의 영역에 있는 평등을 세속에서 실현하는게 神市를 추구하는게 아니면 무엇인가. 그래서 샌델의 공동선을 위한 연대라는 주장은 서부 미국의 교회공동체나 초기 교회공동체를 떠오르게한다.

이는 그가 제비뽑기 대학 입학을 제시할 때 또 드러나는데,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제비뽑기 민주주의를 하였다. 그의 제비뽑기 언급은 아테네 아고라에 대한 향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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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시장경제의 본질을 능력주의라고 보고 있는데, 시장경제의 본질은 능력주의가 아니라 성과주의다. 능력이 얼마나 됐던 노력을 얼마나 했건 시장은 얼마나 소비자 효용에 기여했는가에 따라 보상을 할 뿐이다.

우리가 김연아의 피겨를 보며 즐거워 하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가가 아니라 그녀가 보여주는 성과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는 최고가 된 이후 그녀의 서사를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일 뿐이다.  

물론 성과가 노력이나 능력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또한 우리의 삶이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한걸음씩 더듬어 가야하는 실험이기에 우리는 그저 능력것 열심히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을 늘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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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능력주의 세상에서 엘리트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능력주의의 폐혜가 고작 오만함 뿐이라면, 그 부작용으로 능력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샌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부작용을 잔뜩 끌어와서 본질을 비판하는 방법을 즐겨쓰는데, 예를들어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있으니 항암치료 그 자체를 없애라는 것과 같다.

엘리트의 오만도 그렇다. 그들이 능력것 성공했다는 교만함이 표출되는게 문제라고 능력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는건 심각한 비약이다.

게다가 오만함이라는게 과연 능력주의의 부작용인가? 실제로 오만함이란 엘리트로부터 나올 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끼리 훨씬 많이 존재한다.

당장 동창회라도 나가보면 그 중 몇몇은 자기 자랑을 못해 안달이 나지 않던가. 오만함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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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정의>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그의 반시장적인 태도에 상당히 실망했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현대 사회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매우 정태적인 시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1986년?에 쓴 '절차공화국'에 대한 논문에서부터 죽 이어지던 '공동선'을 향한 그의 열망이 결국에는 공허한 '능력주의'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적인 시각의 좋은 예는 후반부에 나오는 미국 공화당에 제의하는 그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공화당에 제안하는데 바로 광부 등의 일의 존엄성을 위해 그들을 보호하는 규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것 같다. 바로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아닌가?
 
소비자 중심이 아닌 광부라는 노동자를 위해 규제를 만들게 되면, 철을 쓰는 산업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한 만큼의 비용이 가격 상승의 요인이 된다. 만약 철을 사용하는 산업이 자동차 산업 단 하나만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미국 GM과 포드는 종전보다 비싼 철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GM과 포드는 폭스바겐, 도요타, 현대랑 경쟁을 해야되는데, 비용의 상승은 그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GM과 포드는 점차 망하게 된다. 그러면 광부 또한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러 규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샌델은 아직도 이걸 모를까.
 
공동선을 향한 그의 열망은 어떨까? 공동선을 위한 연대라는 주장에는 여러가지 얘기해볼 거리가 있다. 천 개의 도덕이 존재하는 현대에 공동선을 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공동선이라는게 존재하기는 할까? 이를 위한 연대가 실제적으로 평등한 토론을 보장할까?
 
예를들어 독서모임원과 마이클 샌델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가정해보자. 샌델의 말처럼 우리가 소통, 대화를 통해 공동선을 만들어 낸다면 그럼 그 공동선은 누구의 의견이 관철되는가? 아마 마이클 샌델의 의견이 공동선으로 관철될 가능성이 크다. 그가 사회적, 지적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독재자를 만들어내는 원리와 똑같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가는 '선'이라는 것을 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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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샌델이 주장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성공은 능력이 아닌 운에 의해 결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과연 인간의 성공이 운에 의해 결정된다 했을 때, 심지어 샌델은 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말하는데(정확히는 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주장한 프랭크 나이트의 말을 인용하며 동의를 표한다), 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사회에서 도출될 수 있는 도덕은 무엇이 있을까?
 
샌델은 계속 공동선을 말하는데, 과연 운으로만 결정되는 세상에서 공동선을 도출할 수 있을까? 내가 노력하던 말던 성공이 운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옳은 삶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옳은 삶을 살던 말던 어처피 운에 의해서 성공이 결정될 거니까.
 
운에 의해 결정되는, 가치의 위계가 없는 사회를 본인이 상정해놓고선 거기서 공동선을 계속 만들어내자고 하니 또한 그의 말이 공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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