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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어빈2 2024. 2. 13.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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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존 윌리엄스
평점 6
 


개요


스토너는 존 윌리엄스라는 미국 작가가 1965년 발표한 소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잊혀졌던 이 책은 50년이 지난 후에야 재발견 되었고, 이는 존 윌리엄스 사후 20년만에 제대로 된 위치를 찾았다는 평을 받는다.

알라딘 책 소개에 따르면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내용


윌리엄 스토너라는 가상의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며, 19세기 말~20세기 중반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윌리엄 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를 농업 대학에 보내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며, 스토너는 1910년 미주리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농업보다는 영문학에 관심을 가진 스토너는 영문학으로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대학에서 1956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조교수로 근무한다.

 


느낀점


독서 토론 책이라서 읽게 되었다. 의외로 재밌어서, 새벽까지 꼬박 쉬지않고 다 읽은 책이었다. 

정말로 평이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에는 커다란 갈등도 없고, 그나마 있는 갈등들이 시원하게 해소되는 장면도 없다. 스토너라는 평범하고 재능도 그닥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결혼을 하며, 이후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직장에서도 성공하지 못한채, 그냥 1956년 그 해 죽은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처럼 죽는것이 내용의 전부다.

있는 갈등들이란, 1917년 1차 대전이 터졌을 때 참전을 두고 친구들과의 갈등, 이건 사실 갈등이랄거 까진 없지만 스토너 인생의 중요한 선택중 하나였다. 이후 첫 눈에 호감 간 여성과의 결혼, 그러나 평생을 그 여성으로부터 무시당하며 사는 삶. 대학에서 불성실한 제자를 두고 영문학과장과 다투어 평생을 조교수로 지내야 됐던 점, 제자와 불륜에 빠졌으나 헤어져야 했던 점 등...

그러나 이런 갈등들은 정의구현이 되는 형태로 진행되지 않으며,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마치 잔잔하나 쓸쓸한 클래식 처럼 흘러가기만 한다. 그래서 다 보고나면 여운이 남는 책이다.

권선징악의 형태를 띄지 않기 때문에 좋았던 점은, 예를들어 스토너의 아내의 경우 처음엔 가정 교육으로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 처럼 나오나, 마지막까지 스토너의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평범하나 스토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어하는 안좋은 아내로 나오는데, 어떤 계기를 통해 정신차리고 좋은 아내가 되는 상투적이고 작위적인 장면 없이 그냥 일관된 아내의 모습을 보인다.

많은 인물들이 이렇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심지어 주인공 스토너 조차 이렇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이 책은 소시민들, 나쁘게 말하면 소인배들의 이야기다.

스토너가 소인배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스토너는 자신게 닥쳐왔던 부조리나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저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점에서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아내가 하나밖에 없는 딸 교육에도 많은 부족함을 보였는데, 스토너는 딸이 자신과 있을 때 더 행복하고 빛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딸을 아내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또는 잘 교육해야 한다는 행동과 열정을 보이지않는다. 그래서 결국 딸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완전히 가정교육에 실패하여 이름모를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집을 떠나게 된다. 여기에 별 분노하지 않는, 그저 그건 니 인생이야 라는 식으로 쳐다보는 스토너의 모습은 영락없는 소인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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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그렇다. 우리는 늘 대인과 소인배, 군자와 소인을 떠들지만, 애덤 스미스의 말 마따나,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다. 평소엔 소인배의 모습이, 그러나 어떨 때엔 대인의 모습이 나오는데 불과하다.

스토너가 대인의 모습을 보인 유일한 때는 불성실한 제자를 두고 절대 입학시킬 수 없다는 학문적 양심을 드러냈을 때다. 그리고 그는 그 일로 영문학과장에게 찍혀서 평생을 조교수로 살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이 소인의 삶이기 때문에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있는 것 같다.

즉 스토너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인생 이야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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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스토너의 삶이 주는 교훈은 뭘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어 그냥 나열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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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의 세 가지 발달단계를 말한다. 

정신은 모습을 세 번 바꿀 수 있지
나는 이것을 '정신의 세 가지 탈바꿈'이라고 불러
처음에는 낙타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낙타가 사자의 모습으로 바뀌고
세 번째는 사자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지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이
짊어질 만한 것들은 많고도 많아.
그런 정신은 존경할 줄 알지
그런 정신은 무거운 것, 더 무거운 것을 감당하려 들지.

"무거운 걸로 줘!"
무게를 견디는 정신은 그렇게 말하거든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짊어지길 원하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지 제1부 1장

 
첫째는 낙타와 같은 삶, 두번째는 사자와 같은 삶, 마지막은 아이와 같은 삶이다.
 
낙타의 삶은 공경할줄 알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삶이다. 무게를 견디는 정신이 삶이라는 사막의 고독속에서 자유를 움켜쥐어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하는데 그것이 사자의 삶이다. 
 
그러나 사자의 삶이 비록 자유를 얻었더라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진 못하는데, 그래서 정신은 어린 아이로 또 한번 탈바꿈한다. 여기서 사자의 자유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이유는, 니체가 말하길, '자유'란 그 당시 인간의 삶을 컨트롤 하던 종교, 정치, 가치관 등으로 부터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식과 통념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은 그야말로 맹렬한 야수와 같아야 하기 때문에, 오직 사자와 같은 맹수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의 정신은, 새롭게 시작되는 움직임이자,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온전히 자신의 의지를 가진, 세계와는 분리된 정신을 뜻한다. 사회의 의무, 종교 등으로 부터 벗어난, 세상과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자신의 의지를 가진 정신을 뜻한다. 
 
스토너의 삶은 어떤 삶일까? 분명히 낙타의 삶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짐을 짊어지며 걸었고 삶이란 사막에서 고독해졌다. 그는 어렸을 때 부터 부모의 권위에 복종했으며, 자신의 일을 다했다. 이후 그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그다지 존경받지 못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죽을 때 까지 자신의 직업,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소명'에 충실했다. 
 
말 그대로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공경하며 무게를 짊어진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자가 되는데는 실패했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는 삶을 살지 못했으며, 그래서 1956년에 미국에서 죽었던 160만명의 사람 중 한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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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보다 정확한 번역으로는 '악의 진부성'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평범성이라고 하니까 뭔가 더 멋있어보이는건 사실이다. 
 
여튼 '평범성'이라는 번역 때문에 많이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마치 '인간의 내면엔 누구나 악이 있으며, 나 자신이 아이히만의 위치에 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정의내린다는 것이다 .
 
그러나 악의 평범성은 그런 뜻이 아니라, 상투적인 말, 진부한 행동, 즉 천착해서 얻은 언어와 행동이 아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진부함이 악을 낳는다는 뜻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무사유가 악을 낳는다는 것을 뜻하며 무사유를 할 수 밖에 없는 국가 시스템 하에서 악은 평범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마이클 샌델의 <The Procedural Republic and the Unencumbered self, 1984> 논문에서 보다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데, 이 논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절차로만 이루어진 공화국이 방종하는 자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절차, 진부함, 상투적인 제도들을 통해 우리는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 제도를 통해 정의가 실현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생각도 없이, 그저 제도를 통하기만 하면 마치 정의가 달성된 것 처럼 무사유를 견지한다면, 그 절차는 고삐풀린 자아, 한나 아렌트의 표현으로는 오히려 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다루는 문제의식도 이와 맞닿아 있는데, 뫼르소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진실된 태도가 그를 사형에까지 이르게 하는, 시대의 '절차'로서의 사법이, 진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이방인>이 던지고 있는, 한나 아렌트와 마이클 샌델이 던지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스토너의 삶은 악을 낳았다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그의 자식 교육에 있어선 그는 악을 낳았다. 그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딸의 인생이 파탄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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