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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도메 다쿠오

어빈2 2024. 2. 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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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도메 다쿠오
평점 10

 


개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저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아주 잘 요약해놓은 책이다.
 
저자인 도메 다쿠오 교수는 현재 일본 오사카대학교 경제학과 경제학설사 교수로 있으며,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에 관한 다양한 연구 활동으로 알려져있다. 

 


내용


총 2부로 이뤄져 있으며, 1부는 <도덕감정론>을, 2부는 <국부론>의 핵심을 잘 설명하고 있다. 
 
1부 도덕감정론(이하 도덕)의 세계
<도덕>의 목적은 사회질서를 이끌어내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질서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이 어떠한 규칙을 따름으로써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애덤스미스는 사회질서란 '감정'에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심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p. 39 <도덕감정론> 1부 1편 1장

 
즉 상대방에게 동감할 수 있는 생물이 인간이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공평한 관찰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는 양심으로도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 공평한 관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되고 양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공평한 관찰자를 잘 따르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 잘 따르지 못하고 언제나 세간의 평가를 걱정하는 사람을 연약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동양적 의미로는 군자와 소인을 들 수 있겠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지혜로움과 연약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더 나아가, 이런 복잡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사회질서가 비록 '공평한 관찰자' 덕에 정의, 의무감 등을 형성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번영을 이끄는 본성이 되는가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마 내 생각엔 이 부분이 <도덕>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애덤 스미스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야심을 갖고 있으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왜냐하면, 지위와 부는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마음의 평정(tranquility)과 향유(enjoyment) 가운데 있다. 평정 없이는 향유할 수 없고 완전한 평정이 있는 곳에 향유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p 83<도덕감정론> 제3부 제3장

 
애덤 스미스가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은 3가지이다. 
 
1. 건강할 것, 2. 빚이 없을 것(구걸하는 삶이 아닐것), 3.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것
 
'공평한 관찰자'의 말을 잘 따르는 '지혜로운 인간'은 행복의 3가지 조건이 갖춰져있다면, 최저 수준의 부에 도달했을 때, 더 많은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유리걸식하는 상태가 아니라 나와 가족을 비록 초라하지만 책임질 수 있는 상태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이 갖춰진 것이고, 이 때부터 행복은 주관의 영역이란 것이다. 
 
이 말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해하며 자살하는 사람들에서 보듯이, 더 많은 부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연약함'을 지니고 있어 행복과 상관없는 부와 지위를 더 추구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여기서, 연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를 추구하는 행위를 '기만'이라고 부르는데, 핵심은, 그 '기만'이 바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문명화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예를 드는 것은 이러하다. 
 
예를들어 10명의 사람이 10의 토지를 1씩 나눠가졌다고 하자. 그랬을 때 소출이 각각 1씩이라고 가정하자. 그럼 사회의 생산물은 10이다. 
 
그런데, 한 명의 연약한 사람이 기만하여 혼자 10의 토지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비유는 정확히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잘 들어맞는 비유인데, 바로 1:99 사회라 불리는 부의 양극화의 비유랑 논리구조가 똑같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이 10의 토지를 갖고 있다 하여도, 필수품의 분배에 관해서는 사회 구성원 간에 평등하게 분배됨을 주장한다.
 
10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1명의 인간은 연약하여 계속 부와 지위를 추구한다. 그러나 혼자 10을 경작할 수 없기 때문에 3명을 고용할 수 있다. 또한 더 좋은 마차와 구두, 옷을 구하기 위해(지위를 추구하기 때문) 10의 토지로부터 나오는 소출을 일정부분 매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부자라고 해도 10의 토지에서 나오는 10의 소출을 다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토지가 없는 나머지 6명의 사람은, 구두를 만들고, 마차를 만들고 말을 기르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또한 10의 토지를 한 명이 갖고 있으면 규모의 경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토지 생산성이 오른다. 
 
즉, 한 명의 기만이, 사회에 다양한 물품들이 생산되게 만들며, 이후 <국부론>에 나오겠지만, 이것이 분업과 전문성의 원리가 되며, 9명은 토지가 없음애도,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을 분배받게 된다. 
 
<도덕감정론>에서 딱 한번, <국부론>에서 딱 한번 '보이지 않는 손'이 나오는데, 맥락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도덕감정론>에선 바로 이 부분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나온다. 필수품의 분배에 관한 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모두가 평등하게 분배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토지의 생산물은 언제나 그것이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주민을 유지할 뿐이다. 부자는 단지 생산물의 집적 중에서 가장 값나가고 좋은 것을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보다 별로 많이 소비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들의 천성의 이기심과 탐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량의 성과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토지가 모든 주민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졌을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분배를 하게 된다. 

p 91 <도덕감정론> 제4부 제1장

 
이렇게 필수품의 분배가 이뤄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더 많이 갖고 있거나 부자인 것이 9명중 한명인 나의 행복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행복의 3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그 이후의 행복은 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회가 번영하면서 동시에 모두가 행복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국가의 행동 원리가 도출된다. 
 
왜 영국이 프랑스처럼 급격한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시민혁명을 통해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애덤 스미스는 그렇다 하더라도 위법적인 행동으로 욕망을 추구하면 안되며, 페어플레이 정신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공평한 관찰자'의 논리는 국제질서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2부 국부론의 세계
 
<국부론>은 '국민의 풍요로움'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생산적 노동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여기서 생산적 노동이란, 농부, 공장 노동자 등 무언가를 생산하는 직에 종사하는 노동을 뜻하고, 비생산적 노동이란, 가수, 공무원, 정치인 등 서비스 직을 뜻한다. 여기서 무언가를 애덤 스미스는 필수품과 편의품이라 한다. 
 
이 파트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분업을 통해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자본 축적을 통해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다. 자본축적을 하기 위해선 자본가가 근검 절약할 필요가 있다. 
 
생산성과 생산량이 증가하면, 사회 전체의 평균 필수품과 편의품의 수량도 늘지만, 가격이 떨어지면서, 사회 최저층의 필수품과 편의품의 수량도 늘게 된다. 이로서 국민의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는, 인간의 교환성향과 설득성향 있으며, 제도적으론 시장이 활성화되어있는 개방경제, 즉 상업사회여야 한다. 이를 통해 '성장'을 달성할 수 있게 되며, 성장의 목적은 국민의 풍요로움, 즉 행복의 증진이다. 
 
생산성 향상은 분업을 통한 전문화로 달성할 수 있으며, 자본 축적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 자본가가 근면성실하여 재투자 할 수 있는 자본의 양을 늘려야 하고, 2) 자본가의 소비가 고정일 때 세금 납입이 줄어들수록 재투자 할 수 있는 자본의 양은 는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낭비와 정부의 낭비를 분석했는데, 개인의 낭비는 개인의 일탈로 그치는 경향이 있어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정부의 낭비는 장기적으로 국가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정부가 전쟁을 하거나, 식민지를 경영하는 등 쓸데없는 곳에 돈을 지출하게 되면, 생산적 노동에 투자될 금액이 줄어들며, 이는 생산성과 생산량 자체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근거로 애덤 스미스는 식민지와 중상주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영국이 미국을 식민지로 하고 있는 것을 매우 비판하는데, 결국 애덤 스미스의 말 처럼 영국은 미국 식민지를 포기하게 된다. 

 


느낀점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이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는 벽돌책이라 진입장벽이 굉장하지만, 그렇다고 현대문명의 주춧돌이 되는 위대한 저작을 안읽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책은 그런 니즈를 충분히 채워주는 아주 좋은 책이다.
 
애덤 스미스의 논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중 하나를 대표한다. 물론 애덤 스미스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며, 철학적 사유의 계보가 있다. 
 
바로,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분명 서양은 중세 천년 동안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봤다. 카톨릭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은 악이었으며, 카톨릭은 지금도 금욕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반면, 유대의 랍비나 개신교는 다르다. 특히 랍비들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악함 또한 주셨는데, 이 악함은 분명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없으면 아무도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농사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악함이란 '욕망'을 뜻하고 욕망이 없으면 인간의 번식과 문명이 끝날 것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개신교도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는데, 욕망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신약성경> 에 잘 나오는데,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디모데전서) 6장 10절

 
 
즉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돈이 아닌 명예, 권력, 여자, 남자 등 무엇을 넣어도 성립하는 명제라 할 수 있다. 욕망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컨트롤하지 못함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나는데, 예를들어 <맹자>를 보면, 
 

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찾아보시니, 

왕이 말하길, 선생(맹자)이 천리를 멀다 않고 이리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이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길, 왕은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맹자> 제1장 양혜왕 장구 상

 
즉 이익을 탐하는 욕망 자체를 악으로 보고 있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관점에서 개신교의 논리가 바로 애덤 스미스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존 로크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여지는데, 애덤스미스가 가정하고 있는 상업사회는, 로크가 이전에 말했던 금/은의 발견과 통상을 기본으로 한다. 
 
누군가 곡물을 생산한 것을 팔아 자신의 창고에 금/은을 가득 쌓아두는 것이 타인의 필수품을 빼앗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으며(금/은을 먹을 순 없으니까), 동시에 생산한 곡물이 교환될 수 있는 통상이 전제됨으로써 누군가가 자신이 필요한 양 만큼의 토지보다 더 많이 가져도 필수품이 분배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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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관점이 현실에 우리에게 주는 인사이트는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양극화, 부의 불평등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산다. 그리고 이를 통한 질투와 르상티망이 정치적으로 발현되기를 기원한다. 폭력으로 발현된다면, 그것이 프랑스 혁명일 것이고, 정치적으로 발현된다면, 사회주의 포퓰리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다르게 말한다. 그리고 당시 영국 사람들은 애덤 스미스의 저작을 상당히 많이 읽었다고 하며, 바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이 중상-중하층의 행복론이었기에, 영국은 급격한 혁명에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을 행복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바로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최저 수준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부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복지사회가 되어 최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부를 국가가 재분배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그러나 장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인간의 연약함, 즉 사회를 번영과 성장으로 이끄는 본성을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사회가 되어 최저 수준의 사람들의 생계를 보조해주기 위해선 누군가의 돈을 뺏어와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보통 부자들을 뜻한다. 그럼 국가가 그들의 재산을 뺏을 권한이 어디있는가?라는 명제부터가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 뺏어온다고 한들, 애덤 스미스의 논리대로, 자본축적의 경로가 막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론 국가가 망하게 된다. 
 
세금 올리면 부자들부터 해서 기업들까지 이민을 가는것에서 우린 이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요즘 국내 투자가 줄고 해외 투자가 늘고 있는데(싱가폴과 미국, 국민연금투자제외) 이는 상속세와 기업 규제 때문에 그렇다.
 
첫번째 방법은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방법으로, 기업에 자유를 주고 노동시장을 자유롭게 푸는 개방경제가 되면, 자본가가 원하던 원치않던 노동자의 삶이 개선된다는 것이다. 성장이 되면 고용이 늘고, 고용이 늘면 최저 수준에 있지 못하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상태의 실업자가 행복의 최저 조건을 달성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대기업을 긍정하는 논리로도 사용될 수 있는데, 한 사람에게 부가 극단적으로 몰려도, 그 사람 때문에 일자리가 생기고 투자가 느는 한, 행복의 최저 조건을 달성하는 사람이 늘게 되고, 그 조건이 달성된다면 이후 행복은 개인의 주관이기 때문에, 국가가 신경써야 될 부분은 바로 최저 수준을 달성하는 데 까지만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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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논리를 보면서 마이클 센댈이 공리주의를 비판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이 허수아비 때리기 식의 무의미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마이클 샌델은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하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부정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논변의 옳다. 
 
그러나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것의 포커스가 거기일까? 공리주의가 말하는 최대 행복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의 양을 늘리는 것이지, 어떤 상태를 정태적인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즉, 사회적 행복이 총량이 정해져있어서 얘 행복 뺏어서 쟤 주는게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자유주의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어처피 행복이란 각자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상태만 만들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데, 아마 공리주의도 그런 맥락에서 비판하려고 한게 아닌가 싶다. 
 
근데 현실적으로, 국가에서 하는 정책이 공리주의에 입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책은 그것이 단기적이던 장기적이던 결국 '더 많은 국민에게 이익을 주기 위함'이라는 전제를 벗어날 수 없다. 이를 벗어나면 부패한 국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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