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책

[책리뷰] 사해 부근에서 - 엔도 슈사쿠

어빈2 2024. 2. 6. 23:25
728x90
반응형

 


저자 엔도 슈사쿠
평점 7

 


개요


일본의 개신교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1973년 소설로 한국엔 1995년 소개되었다.

예수의 삶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의 유명한 소설 <침묵>처럼 상당히 색다른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해석의 이단성은 이 책이 더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 책은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상당히 많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해석은 상당히 이단적이다. 이는 지금은 이단이지만 영지주의적 전통과도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해석이 오히려 잘 맞을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로 완성되는 서사는, 비록 문학적이지만, 주는 감동은 참으로 크다. 

 


내용

 

소설은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엔도 자신이 예루살렘에 사는 자신의 신학교 동기 도다를 만나 도다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여러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도다와 대화하는 장면들이다.

 

도다는 상당히 회의주의적 관점을 가진 학자로, 예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고싶어서 오래전 예루살렘으로 와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엔도를 데리고 다니는 성경의 지역마다 엔도의 신학적 호기심에 대해 그것이 역사적으론 얼마나 무의미한 일종의 관광상품에 지나지 않는지를 늘 설명하며 초를 치기도 한다. 

 

엔도는 신학교때 자신을 가르쳤던 수도사 중 한명인 '생쥐'를 찾고싶어한다. 그는 모든 신학생이 경멸하던 기회주의적 특성을 지닌 수도사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전에 독일로 돌아가있던 그는 유대인 수용소에 갖히게 되고 그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엔도가 궁금해하며 도다와 함께 그를 찾으러 다닌다. 

 

다른 한 트랙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를 바라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당대 사회의 분위기와 예수를 바라보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한 챕터가 엔도와 도다의 이야기라면 다음 챕터는 예수 시대로 들어가 예수를 바라보는 안드레아, 알패오, 제사장, 빌라도, 상인과 백인대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이야기가 한 줄기씩 맡아 덤불처럼 엮여 엔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는 질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느낀점

 

편의상 엔도의 챕터를 파트1, 예수를 바라보는 제 3자들의 챕터를 파트 2라고 한다면, 파트 1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생쥐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쥐가 결국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그가 수용소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아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을 쭉 그리면서 그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이었고 속된말로 찌질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연민이 계속 드러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생쥐라는 케릭터는 소설 <침묵>에도 비슷하게 나온다. 바로 기치지로라는 케릭터다. 나는 아직도 기치지로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이 책과 <침묵>을 같이 놓고 봤을 때 생쥐와 기치지로는 일반 신앙인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어디에나 있는 소시민들, 그 소시민들이 이 책에선 유대인 학살을 맞닥뜨리고, <침묵>에선 일본의 천주교 박해에서 살기 위해 얼마나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지를 잘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라는 것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에서 기치지로는 관원들에게 잡혀가면서 마치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는것 처럼 후미에(예수의 성화를 밟는 행위)로 배교한다. 그러고 풀려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신부를 찾아와 회개를 하고 설교를 듣는다. 그 과정에 여러번 반복되는데, 기치지로는 중간에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들어주세요 신부님. 저는 배교자죠.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10년 전에 태어났다면 선량한 카톨릭 신도로서 천국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배교자로서 신도들에게 멸시받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그러나 박해받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원망스럽습니다. 저는 원망스럽습니다!"

 

과연 우리가 기치지로를 욕할 수 있을까? 기치지로는 누구보다 기회주의적이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 살기 위해 배교를 저질렀다.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신앙생활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이 과연 기치지로보다 나은가?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파트 2에서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예수와 예수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들을 표현하는데, 참 재미있는 설정은 우리가 신약에서 봐온 예수의 기적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기적이 아니라고 작가가 묘사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예수가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내는 장면이 신약에 나오지만, 이 책에선 그저 죽은 소녀 옆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사회의 분위기는 하나도 곱지 않은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를 기다렸건만, 메시아라 불리는 예수가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나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 죽음의 슬픔에 울고 있는 사람들, 장애와 상처 때문에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 옆에서 그저 울어주고 위로해주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사실 예수가 기적을 행했다는 점 보다는, 바로 그가 아픈 이들을 위해 같이 울고 위로해줬다는 인간적인 부분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누구보다 아픔과 상처를 가진 이들 곁에 있었던 '인간'이었고, 그런 존재가 세상의 죄를 대속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부활한다는 이야기는, 마치 영웅서사를 보는 듯 하다. 

 

빌라도 : 그렇다면 그대는 저 의원들 말대로 민중을 선동했다는건가?
예수 : 나는 다만 사람들의 슬픈 인생을 하나한 지켜보고 그것을 사랑하려 했을 뿐입니다. 

빌라도 : 황제는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했다면서?
예수 : 황제보다 예루살렘보다 로마보다 오래오래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 있습니다. 

빌라도 : 로마보다 오래오래 영원히 계속되는게 무엇인가?
예수 :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닿은 흔적,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스치면서 남긴 흔적, 그것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p 224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의 흔적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