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오에 겐자부로
평점 4
개요
며칠 전 작고한 일본의 대문호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으로 1964년 발간된,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이 책은 오에 겐자부로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시발점이 된 소설로도 평가받고 있는데, 그의 작품 중 처음으로 세계적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에겐 히카리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는 태어날 때 부터 뇌 일부가 두개골 밖으로 나온 뇌 탈장(Brain herniation, 뇌 헤르니아) 장애아였고, 결국 수술 후에도 발달장애인이 된다. 히카리는 오에 겐자부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만큼 그의 작품은 장애, 더 나아가 소외받은 사람들에 집중되어있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은 뇌 헤르니아 장애를 앉고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 오히미(버드)가 겪는 갈등과 고뇌를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내용
오히미(버드)는 장인의 도움으로 겨우 학원 강사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27살 젊은이다. 곧 아이가 태어날 예정인데, 그는 책방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프리카를 가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지만 아이의 존재로부터 그의 꿈이 좌절될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를 받아보니 병원에서의 전화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버드는 병원에서 아이의 상태를 전해듣는데, 두개골 밖으로 뇌가 일부 나와 거대한 혹처럼 되어 머리가 마치 2개 처럼 보이는 장애아라는 얘기를 듣는다. 병원에선 이런 아이는 처음이라고 하며 1~2일 뒤엔 죽을 것임을 알려준다.
버드는 그 괴물같은 아이를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어 아내에겐 비밀로 하고 장모와 상의하여 아이가 자연히 죽게 내버려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는 죽지 않았고 병원에선 아이를 어떻게 할 건지 버드에게 물어본다.
수술을 해도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앉고 살아갈 확률이 매우 높다는 얘기를 듣고 버드는 소아과 의사와 상의한 후 아이에게 분유 대신 설탕물을 먹여 수술 할 수 없는 쇠약 상태로 만드려고 한다.
자신의 아이를 쇠약사로 죽이려는 버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움을 감내하면서 아이를 죽이려하지만 아이는 오히려 건강하게 견뎌 수술 할 체력을 갖게 된다. 이에 병원에서 수술을 제안하지만 버드는 그냥 아이를 데려가 낙태 전문 의사에게 처분하려고 한다.
결국 버드는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를 고민한 후 다시 아이를 데려와 수술 시킬것을 결심하고, 다행히 아이는 뇌 헤르니아가 아닌 단순 혹임이 밝혀져 건강하게 퇴원한다.
느낀점
이 책은 주인공 버드의 성장 소설이라 한다. 그가 버드라는 어린애 같은 별명을 가진,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꿈을 꾸는 소년에서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이자 남자가 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그렇다. 내용만 보면 마치 버드가 미친 싸이코 살인마같이 보이지만, 책은 상당히 치밀하게, 질릴듯한 비유를 통해 버드가 겪는 회피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주제는 아주 심플하다. 살면서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분명 견딜 수 없는 힘든 일을 겪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직시하고 현실의 책임을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거짓과 기만으로 이를 회피할 것인가. 이 책은 다소 용두사미 처럼 이를 제시하고 있다.
용두사미라 함은, 마지막에 아이의 수술을 결심한 버드의 마음 변화가 고뇌에 비해선 참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를 죽이려는 버드는 의사 앞에서 비정한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아내에겐 모든게 잘 되고 있는것 처럼 거짓말 하는 등 책의 99%가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버드의 모습을 그리지만, 맨 뒤 짧은 페이지에서 결국 모든 회피행동의 목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자로 휙 변해버리는 부분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설정이 다소 무리가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 책을 보다보면 순수한 죄없는 아이와 대비되는 버드의 행동, 생각의 간극이 너무 커서 마치 심각한 부조리극을 보는 느낌이 든다. 이런 뒤틀린, 어떻게 보면 마치 판타지와 같은 설정에 미사여구를 붙인다고 해도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주제는 심플하기에 버드의 고뇌와 주제의 등가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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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 부분 해설을 보니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버드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데...
자기 아이를 아주 적극적으로 죽이려고 한 사람이 거짓과 기만을 꿰뚫고 책임지겠다는 양지로 올라온 것을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기엔 버드는 너무나 적극적인 행동으로 아이의 죽음을 유도했다. 아이가 안죽었으니 망정이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쇠약상태로 만들기 위해 분유대신 설탕물을 먹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해지자 낙태 전문 의사에게 맡겨 아이를 처분하려고 한 그의 행동이, 개심했다고 해서 성장이란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아이는 예상괴는 다르게 뇌 헤르니아가 아니라 단순 혹이었다.
성장이라고 본다 해도, 버드가 얻은것은 부성애일까 책임감일까? 이 책 어디에도 부성애는 나오지 않으니 책임감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 나중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 아이를 죽이는 극단적 수단까지도 선택할 수 있는 버드의 성향상, 그가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다 느끼는 선택조차도 극단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거 아닌가? 즉 확신범과 동일한 행위가 벌어지는게 아니냔 거다.
버드가 얻은 책임감은 자신의 인생을 직시한다는 구색좋은 허울을 덮었으나 여전히 타인을 수단화하는 인생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기를 둘러싸고 얘기하는 버드, 장모, 의사들은 생명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한다. 1964년 일본의 배경을 알지 못해 이게 일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없는 아기의 생명을 죽이고자 하는 버드가 양심의 가책을 잊기위해 온갖 변명하는 모습은 참으로 위화감 드는 부조리 그 자체이다. 그가 직시한 것은 닥친 현실이지 아기라는 생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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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엔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까, 아(兒)-기 라고 불렀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기는 벌레나 무생물의 뒤에 붙이는 접미사로 막대-기, 구더-기같은 용도로 쓰인다. 아기를 엄마에 기생하는, 사람이 아닌 존재로 봤기 때문이다.
돌이 지나면 비로소 사람에게 붙이는 접미사 -이가 붙어서 아(兒)-이 라고 불린다. 멋쟁-이 등이 좋은 예다.
한국은 남아선호사상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아이가 셋 있는 집안의 성비를 보면 첫째와 둘째는 50:50 정도지만 셋째의 비율은 매우 심각한걸 알 수 있다.
1993년의 경우 전국 평균이 207이라는, 남녀비가 67:33인데, 이 만큼의 태어나지 못한 여아들은 전부 낙태로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할수 있다.
이 또한 아기를 사람으로 여기지않는, 엄마에 기생하는 존재로 보는 한국의 언어문화와도 상관있지 않을까?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문화라는 가정하에 이 책이 보여주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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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피터슨 등 남성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한결된 목소리는 남자를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책임'이라는 것이다. 남자가 목적을 내면화하게 된다면, 마치 유해한듯이 보이는, 구천을 떠돌고있는듯한 남성성은 상정된 책임을 꼭지점으로 쓸모있게 변한다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사실 그게 남자들이 인생을 값지게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본인 외에 자신이 상정한 가치를 위한 책임감은 남성을 남자로 만든다. 그게 우리 아버지들의 일반적 모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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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찝찝함과 질척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표현이 적나라하다. 이책은 다소 초기에 쓰인 책이라 그런지 비유들이 다소 현학적이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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