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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최후의 유혹 - 카잔차키스

어빈2 2023. 4. 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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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
평점 9

 


개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그리스의 국민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1953년 발표된 대표작 중 하나로, 원래 제목은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다. 예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종교소설이라 기독교 저항감을 없애기 위해 한국어 제목으론 '최후의 유혹'으로 선정되었나보다. 
 
카잔차키스가 마태오 복음 비롯 신약 4복음을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했으나 <다빈치코드>와 같은 결의 책은 아니고 상당한 신앙이 담겨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기독교계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다. 책 내용의 큰 틀은 신앙적이지만 이로 향하는 길에 있는 인간적 표현과 이스카리옷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이단'적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해석은 아주 볼만해서, 바로 이런 종류의 신앙 소설이 오히려 신앙을 풍부하게 해주는 아주 좋은 질료가 된다는데에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반대급부로, 이런 종류의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무슬림이 왜 저지경까지 됐는지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1989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 윌렘 데포 주연의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도 있다. 책이 75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이기 때문에 혹시 관심이 있다면 영화를 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굉장히 큰 반전을 담고 있는 소설이고 이 리뷰에서는 반전을 다 소개하려고 하니 이 작품을 볼 생각이 있다면 여기까지만 읽어주시면 된다. 

 


내용(매우 스포일러)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만들며 반쪽짜리 목수의 삶을 사는 예수. 그러나 그는 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어둠 속에 두려워한다. 그의 꿈도 늘 사납기만 한데,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는 듯, 불을 내리는 꿈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수가 종종 보여주는 공포에 찬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가끔 예수를 찾아와 그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것 같다는, 그의 등에 후광이 보이는것 같다는 랍비의 말을 들으면서, 예수가 하느님이 점지한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가 사랑하는 막달라의 여인 마리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신은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가정을 만드는 인간적 기쁨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운명은 예수를 가만두지 않았고 그를 사막으로 이끈다. 사막에서 고된 영적 갈등 끝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 임을, 세상을 구원할 존재임을,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했다면 자신은 불로 세상을 세례하는 운명임을 깨닫고 온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하나 둘 생긴다. 그 중 가리옷 사람 유다는 열심당 같은 과격한 방법론을 추종하는 거친 남자로, 처음부터 예수의 말을 듣고 그의 존재를 의심한다. 그래서 사막까지 예수를 쫒아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죽일지 말지를 고민한다. 그러나 각성한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깨닫고 예수를 어느정도 인정하고 따르게 된다. 
 
그리고는 성경과 비슷하게 예수의 다양한 기적들이 펼쳐진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성전이 곧 무너질 것을 장담하지만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 제자들 모두가 부끄러워 하고 있을 때 예수는 자신이 불로 세상에 세례하러 온 존재가 아닌, 자신이 죽고 부활함으로써 세상을 정화하러 온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조용히 유다를 부른다. 그리고는 무지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뒤로한 채 유다에게만 자신이 죽고 부활해야 함을 설득시킨다. 이를 위해 유다로 하여금 자신을 배신하게 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아 가도록 지시한다. 
 
결국 붙잡혀 빌라도의 심문 후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 그는 창에 찔린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기절한다.
 
조용한 소리에 눈을 뜨니 그는 마치 에덴 동산과 같은 곳에 와있다. 그리고 한 천사가 다가온다. 스스로를 수호천사라고 밝힌 그는 평생을 투쟁해오며 살았던 예수가, 모두에게 버림 받은 예수가, 이제는 행복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선포하고 그를 인도한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냐고 묻지만, 그것은 모두 꿈이었을 뿐 그에겐 인간의 삶을 살 자격이 있음을 다시금 호소한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는 라자로의 두 누이 마르타,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가 행복한 인간의 삶의 끝자락에 왔을 무렵 로마의 공격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까지 다다른다. 
 
그 때 그의 집에 옛 제자들이 방문한다. 다 늙은 제자들을 마주하며 옛 추억에 잠긴 예수는 문득 유다를 기억해낸다. 유다에게도 친절한 인사를 건내려고 하나 유다는 예수를 배신자, 반역자라 부르며 화를 낸다. 자신이 예수를 위해 배신까지 했음에도, 이를 통해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이스라엘을 구원했어야 함에도 인간의 삶을 사는 예수를 비난한다. 
 
예수는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음을, 자신의 수호천사가 자신에게 하느님의 뜻을 다시 알려줬음을 변명하지만, 유다는 모든 것을 일축하고 그 천사가 수호천사가 아닌 사탄임을 알려준다. 
 
그리고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손가락질 하며 배반자!, 도망자! 겁쟁이!라 한데 외친다. 죄의식에 몸서리치던 예수는 자신의 손과 발에 상처와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번쩍 든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유혹이 그를 엄습했으나, 극복한 것이다. 그의 아내, 아이들, 결혼 생활, 욕보이던 늙은 제자들은 모두 사탄이 보낸 거짓이자 환상이었다. 그는 인도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올바로 되었다.
 
"이루어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느낀점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반전을 갖고 있다. 영화를 먼저 봤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선 마치 식스센스를 보는듯한 소름을 느꼈다.
 
반전의 극적임은 소설보다 영화가 나은데, 영화는 마지막에 예수가 수호천사가 아닌 사탄임을 깨닫고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께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잘못 알았음을, 자신이 실수했음을, 다시 하느님의 아들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용서해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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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금서가 되었던 역사는 참으로 안타깝지만, 분명 상당히 논란이 될 만한 표현들이 있다. 예수가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계속 도망다니는 장면,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예수를 엄습했던 '최후의' 유혹 등. 그러나 최후의 유혹은 오히려 훌륭한 신앙의 완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미있어 할까? 신화의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설교를 듣거나 미사에 참석하거나 등 기독도들이 종교를 접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는데서 오는 공감과 숭고미는 강력한 믿음의 바탕이 되는 부분 중 하나다.
 
마리아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기에, 아들이 행복하게 살길 바랄 수 있고, 예수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이다.
 
사람의 아들이 신으로부터 주어진 운명을 마주했을 때, 그 길에서 인간 누구나 겪는 유혹에 휘말렸을 때, 그러나 이를 훌륭히 견뎌내고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가 믿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우리 각자 신앙의 서사에 또 다른 '경외'라는 이름의 풍미를 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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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다른 재미있는 점
 
1. 예수와 마리아 둘 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모르고 있다.
 
이 설정이 참 재미있는데, 수태고지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성모는 이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한 채 희미하게 느끼기만 한다. 예수 또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 그래서 하느님이 자신을 부를 때 시도때도 없이 도망가려고만 한다. 
 
2.  유다에 대한 해석
 
조선땅 배신자의 아이콘이 이완용이라면, 서양은 유다다. 예수를 푼돈에 팔아넘긴 유다는 지금도 자녀의 이름으로 쓸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은 유다를 매우 강인한 남자이자 마지막까지 예수가 믿었던 제자로 설정하고 있다. 유다는 열심당원의 방법론이 옳다 생각하여 로마를 부숴버리려고 하지만 열심당 자체는 추종하지 않는 일관된 남자다. 그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다른 제자들 모두를 유약한, 도움 안되는 쩌리들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긴가민가할 때 그가 가짜 메시아라면 죽이기까지 하려고 든다.
 
그러나 일관되고 강인한 그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예수는 나중가선 유다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특히 예수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죽음에 이르는 길을 온전히 유다가 짊어지도록 한다.  

 

유다는 머리를 수그렸다. 잠시 후에 그가 물었다. "만일 당신이 스승을 배반해야 할 입장이라면, 그를 배반하겠습니까?"

예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예수가 말했다. "아뇨, 내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가엾게 여겨 그보다 쉬운 일을 맡겨 십자가에 메달리도록 하셨어요"

 

다른 제자들은 믿을 수 없고, 자신이 십자가에 메달리는 것 보다 유다가 하려는 일이 훨씬 힘든 일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니 말이다. 그만큼 유다를 믿었고 유다는 예수의 말을 충실히 이행한다. 
 
3. 최후의 유혹
 
가장 큰 반전이자 이 책의 묘미이다. 속된말로 아 x발 꿈인데, 고상한 말로 호접지몽이라고 하겠다. 예수가 마지막까지 놓치 못했던 인간으로서의 삶이 그의 최후의 유혹이었고, 이를 명예롭게 이겨내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이 아들이 비로소 되는 장면은, 그리고 비로소 요한 복음서 19장 30절에 나오는 "다 이루어졌다"를 외치는 장면은 카잔차키스가 왜 위대한 소설가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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