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경제

두 개의 자본주의 종말론

어빈2 2022. 2. 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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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자본주의 종말론이 있다.

하나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주의 종말론이다.

이미 막스에 대한 두 권의 책리뷰를 통해 막스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리뷰한 바 있다.

막스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사유재산을 개인의 기본권 중에서도 중한 것으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자본주의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세계관이 나이브한 이유도 어떤 존재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것만 없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미학적, 종교적 신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막스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잃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공산혁명만이 해결법이다. 혁명을 통해 막스는 그의 책 <공산당선언>에서 말했듯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등장할 것이라 예언했다.

이 말은 사유재산을 없앤다면, 인간이 종으로서 갖고 있는 '이기심'이란 욕망 그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는 분석을 근거로 한다.

 

만약 이기심이 없어진다면, 각자의 자유로운 행동은 타인을 위한 행동이 될 것이며, 결국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막스의 주장은 인간 개조를 통해 자유(라고 쓰고 방종이라 읽는다)를 극복하고 초사회적인 존재로 인간을 재탄생 시키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개인이기에, 오직 사회적 존재이기만 한, 마치 꿀벌과 같은 인간은 불가능하다.

역사에서 보다시피 나치, 스탈린, 모택동은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통제, 개조하여 공동체에 적합한, <반지의 제왕>의 오크와 같은 존재로 만드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그들이 꿈꿨던 전체주의, 공산주의도 실패로 끝났다.

막스의 예언은 어디가 틀렸을까?

첫째, 그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생산성이 극에 달했을 때, 동시에 브루주아지의 착취도 최고에 달했을 때 '무산자 계급'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고, 높아진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각자 자유로운 세상, 즉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이 온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가 극에 달했던 영국, 미국 등에선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엉뚱하게 러시아, 중국, 베트남같은 곳에서 일어났다.

왜일까?

자본주의는 신뢰, 법치, 다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와 짝이 잘 맞는 이유도, 기본적으로 내것과 네것을 구분하고 이는 신분, 인종, 성별을 넘어서며, 그런 프로세스를 법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유주의가 짝을 이루는 프로세스는 역사상 영미 문화권에서만 가능했던 모델이었는데, 다수의 인간에게 불가능한 이유는 인간답게 사는 한 달성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살지 말라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자유주의의 가르침이다. 인간답게 마녀사냥이나 하고, 남의 것 뺏고, 화나면 때리고, 약탈하고...야만에선 자본주의-자유주의 불가다.

공산주의는 지연-혈연-신분에 근거한 기득권의 착취와 약탈이 일상화된 사회의 20세기 버전이다. 귀족을 브루주아가 대체했다면, 브루주아를 프롤레타리아로 대체하겠다는게 결국 공산주의가 제시한 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영미에선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문명화된 국가에 공산혁명은 그 자체로 반동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를 해본적도 없는 전근대적 왕정 러시아, 중국에서 독재자의 통치 명분으로 공산주의라는 또 하나의 전근대성이 필요했을 뿐이다.

둘째, 사유재산을 없앰으로서 이기심을 없앨 수 있다는 막스의 분석은 틀렸다.

실제 공산사회에서도 각자의 이기심은 없어지지 않았고, 끝없는 기득권의 부패와 아무도 일을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기심을 표현했다.

자본주의가 정의로운 이유는, 정의를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의가 실현되고 사회의 효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조셉 슘페터의 종말론이다.

조셉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말로 매우 유명한데, 경영학을 공부하면 반드시 들어보게 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우수한 체제로 봤으며, 영속을 꿈꿨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 행위가 벌어지는데, 이는 기존에 있던 것을 파괴하는 형태로 발생한다.

스마트폰이 폴더폰을 파괴했으나 인류를 한 단계 나은 곳으로 이끄는것 처럼 말이다.

이처럼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생산력 향상이 인간을 보다 나은 문명 속으로 인도한다고 봤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가 영속할 것이라고 예측하진 않았다. 이 때문에 문맥도 고려하지 않고 '주류 경제학자 슘페터조차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간다고 주장했다!' 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슘페터가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로 갈 것이라는 예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슘페터는 지식인을 부정적으로 봤다.

지식인은 기득권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봤는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좋은 예가 되겠다. 이 책은 군주가 어떻게 지배해야 하는가에 대한 처세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아무런 의심이 없고 당연한 전제로 설정되어있으며, 그 위에 지배계급의 지배 방식만을 말하는 책이다.

이처럼 지식인들은 권력의 중추에 붙어서 그들의 지배 명분을 만들어내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키기 때문에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언론인, 교수, 작가 등 바로 지식인들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빌어붙는 권력자는 누구일까?

표면적으로는 정치인이다. 폴리페서라는 멸칭처럼, 그들은 정치인이 '당선'되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온갖 곡학아세를 하는 존재들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당선' 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지식인들이 빌붙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대중이다.

슘페터는 지식인들이 권력의 원천인 대중에 빌붙는다고 했다. 대중의 기분에 맞춰주고, 대중이 하는 행동들을 정당화 해주기 위해 지식인들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대중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속성을 갖는데, 인간답기 때문이다. 이 말은 대중은 진실과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정치인은 대중한테 선택받아야 하기 때문에 대중이 좋아하는 '공익, 공공성'이란 단어를 내세워 정책을 입안하게 된다. 이 때 이런 사회주의 정책들이 정당성과 명분을 갖도록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이재명이나 윤석열이 떠드는 소리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슘페터의 말이 맞다고 동의하게 된다. 그저 듣기 좋은 소리만 떠들어대는 그들의 공약을 쳐다보면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가게 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자본주의-자유주의는 체제를 부정할 자유까지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대중인기영합주의로 치닫는다. 이는 대부분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해주겠다'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국가가 개인과 가족, 시민단체의 영역을 점점 침범할수록 국가는 사회주의로 가게 된다.

그래서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로 간다는 종말론을 제시한 것이다.

막스는 틀렸다.

슘페터는 틀렸을까?

상기한대로 자본주의-자유주의는 인간답게 사는 이상 영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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