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사회

동학 농민운동과 일진회

어빈2 2021. 5. 1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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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현재는 천도교라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는데, 대통령이 종교 지도자들 모아서 밥먹을 때 4대 종파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비추는, 10만여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는 종교이다. 
 
동학농민운동은 1893년부터 1894년까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농민반란으로 알려져있으며, 녹두장군 전봉준이 동학 농민운동을 이끈 사람으로 유명하다. 얼마나 유명한지 종로 한복판에 동상도 세워져 있다. 
 
일진회는 1904년 송병준, 이용구, 윤시병 등이 만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이자 회원 규모가 14만여명에 이르는 시민단체로 친일활동을 했고 실제로 한일합방을 청원하기에 이르는 등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데 가장 앞장섰던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두 단체는 사실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일본으로 도망가 있었던 3대교주 손병희와 그의 제자 이용구는 일제의 근대화된 모습을 보고 문명개화노선으로 생각을 바꾸게된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다시 한반도로 온 이용구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초토화된 남접 중 전라북도 세력 일부와 피해를 받지 않은 평안도 중심의 북접 세력을 규합하여 진보회라는 단체를 만든다.

한편 갑신정변 이후 박살나있던 독립협회도 유신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뜻이 맞았던 두 단체는 하나로 합치게 되고 초대 회장은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이, 그 다음은 동학 출신 이용구가 맡게 된다.
 
한일 합방 때 '나라가 망했는데 자결하는 사람이 없어 되겠는가'하고 자결한 순국선열인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동학의 잔당들은 각지에 숨어있었으나, 그 영향력이 미비하였다. 그러나 1904년 송병준이 일진회를 창설하게 되고 동학 잔당들은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일진회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 후기가 어땠는지를 알고 싶으면 북한을 보면 된다. 남북이 갈라지던 1945년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남쪽은(사실 남쪽이라기 보단 이승만이 선택한거임)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이렇게나 성공한 나라가 되었고, 북쪽은 김일성 공산 전체주의를 선택하여 이씨 조선에서 김씨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거짓 사극들을 통해 우리는 마치 조선이 참 살기 좋았던 평화로운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은 거지같은 나라였으며,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였다. 수량경제학에서 분석한 조선 후기를 보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흉작이 심했고, 땔감이 없어 대부분이 민둥산이었으며, 양반 계급에 의한 착취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gdp를 1990년 환율 기준으로 본 통계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평균이 900달러였고 조선 후기는 700달러정도라고 할 정도로 조선은 열악했다. 지도층은 민비에서 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폐단이 극성이었고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투쟁은 안그래도 망해가는 나라에 부채질까지 한 것이라 볼 수있다. 조선은 그만큼 세계에서도 1, 2등을 다툴 정도의 후진국이었던 것이다.
 
조병갑 사건에서 보듯이 농민들은 부패와 반상(班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전근대를 탈피하고 근대화를 원했던 이들은 동학 농민운동을 통해 어떻게든 근대화를 달성하고 싶었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보여준 태도는 '자력갱생불능'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고위 관리들 조차 서양인을 일목인(一目人)으로 알아 눈이 왜 두개인지, 뒷통수에 뿔은 없는지 물어보는 내용이 남아있는데, 그만큼 조선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이 낙후되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자력 근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 농민들이 왜 일본을 선택했는지를 알 수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닌 서양인(러시아)을 택하느니 그래도 같은 인간인 일본인과 손잡고 양반을 타도하자는 것이 바로 동학 농민들이 일진회로 변하게 된 주요한 이유라는 것이다. 
 
동학 농민들이 10년 뒤 일진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조직을 갖춘 것은 결코 의외가 아니며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는다. 심지어 현 대통령은 동학농민운동 유공자까지 만들어 보상하려는 움직임을 정권 초에 보이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개정안 국무회의 통과

보도자료제목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개정안 국무회의 통과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 등록 가능 -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도종환, 이하 문체부)는 3월

www.korea.kr

그럼 우리는 물어봐야 한다. 
 
'오 당신이 동학 농민운동 참여자의 후손이군요. 그럼 당신의 선조는 농학 농민운동 10년 뒤엔 일진회에 있었겠군요?'
 
일제가 모든 것에 대해 총칼을 들고 협박하여 나라를 뺏고 우리를 핍박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런면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은 '약탈형 도적'이 아니라 '정주형 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내선일체가 뜻하는 것이 바로 '정주형 도적'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는 그 시대가 어땠는지를 그 시대 사람의 입장에서 알아야 한다.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금의 잣대로 심판하려는 태도는 매우 잘못되었다고 할 수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와서 일제를 심판하겠다고 게거품을 무는 사람들의 수준이야말로 일제시대였다면 대표적으로 친일을 했을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와서 누가 친일파니 아니니를 심판한다고 해서 그 시대의 슬프고 치욕스러운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당화 되는것도 아니며, 조상들의 무지함이 순결함으로 대체되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기억하고 반성하고 그 모순을 마음 속에 살려놓는 것이지 누군가를 공격하고 심판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아큐처럼 정당화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태도야 말로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비열한 태도이며 역사는 자랑스러워야만 한다는 민족주의 사관의 위험한 점이기도 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금의 우리의 교훈으로 삼고 어느 시점에선 반성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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