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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어빈2 2021. 8. 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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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토마 피케티
평점 5

개요
이 책은 프랑스 내에서는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이슈가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좌익언론들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일부 우익 언론들도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다루면서 마치 이 책이 현재 대한민국의 암담한 현실의 해결책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이 보도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사놓고 안읽는 책 1위 라는 불명예를 안고있다.

언론에서 크게 보도되어 유명한 책이 되었지만 교양서적이 아닌 전공논문이며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은 독서량이 점점 줄고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다소 읽기 어려워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된다.

21세기 자본(Capital in 21 century)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막스의 자본론(Das Kapital)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피케티 본인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막스의 <자본론>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자신은 막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막스와 엥 겔스의 공산당선언과 독일 이데올로기는 읽어봤다 했다).

실제로도 피케티는 막스와는 다르게 반자본주의자는 아닌 것 처럼 보인다. 막스는 사유재산제도 폐지, 소득 누진세, 모든 상속권 포기 등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나 피케티는 높은 누진세와 높은 상속세를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 하지도 않았다.

그럼 책 제목이 왜 막스의 자본론을 떠오르게 하는 <21세기 자본>인가 하면 빈부의 격차가 바로 자본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통계를 통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총 4부로 구성되어있으며 1~3부까지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통계를 통해 자본의 소득비 율과 소득의 불평등, 자본소유의 불평등을 증명하고 있다. 불평등의 원인은 자본 세습이며 이 때문에 세습 자본주의라 비판하고있다.

특히 세습에 대해서는 날때부터 가진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 세습을 통해 부가 고착화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3원칙에 대해 주장한다.

첫째는 자본소득비율은 자본 수익율에서 자본 소득을 곱한다는 공식으로 자본소득비율 = 자본수익율*자본/국민소득이다.

두번째는 자본소득비율은 저축률과 경제성장률의 관계라는 것이다. (자본소득비율 = 저축률/경제성장률)

세번째로는 자본수익율이 항상 경제성장률 보다 높다는 원칙이다.

이 세가지 원칙을 통해 피케티는 불평등이 심화되고있 으며, 이어서 4부에서는 정책으로 나아갈 방향 등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 정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 졌는데, 1930년대 피크였고 그 이후 1940년대 불평등이 서서히 완화되었다가 1980년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고, 2010년 이후부터는 1930년대의 수준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자본 불평등의 이유는 자본 수익율이 경제 성장률 보다 항상 크다는 자본주의 제 3법칙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자본이 있으면 부가 더 커지기 때문에 자본에 대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또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의 역사는 항상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냥 놔두면 자연스럽게 나빠지기 때문에 정치학이 경제학을 주도하여 정치적인 결단을 통해 자본주의가 존속 가능한 방향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한다(이 주장 때문에 전통적인 좌파 경제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데 전통적인 좌파 경제학자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피케티는 자본에 대한 글로벌 누진세와 높은 상속세를 주장한다. 자본에 대한 국제적인 협의 없이는 자본이 세금이 낮은 텍스 헤이븐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토마 피케티는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개입하지 않는다면 사회 불안정이 증가하고 민주주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하였다.

사실 불평등의 대한 주장은 옛부터 많이 있었고 피케티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새로운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1755년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에 보면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사회 도처에 불평등 요인이 있고, 사유재산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불평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피케티의 업적은 300년간의 통계를 통해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데에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막연히 불평등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심각하다고 깨닫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느낀점
그러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하는 대로 대한민국을 진단하고 치료한다면 대한민국은 더욱 가난해지고 불평등 해질 수 있다.

1)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불평등으로 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생긴 이래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던 인간사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나서 신분, 계급, 절대빈곤, 문맹등이 없어짐으로써 불평등이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가장 평등했던 시기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볼 수 있다. 그때는 재벌도 없고 부자도 없으며 절대 다수의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만이 있었다.

곧 한강의 기적을 통해 대한민국이 성장하면서 절대 빈곤이 없어지고 국가의 부가 크게 증가하였다. 재벌이 생겨났고 부자들이 생겼으며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1950년대의 평등을 바라지 않는데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시대의 평등을 기억 하는게 아니라 그 시대의 힘들고 어려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등이라는 가치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빈곤이 해소 되어야 그 후에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평등해 질수록 더 평등해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세대가 지나면서 과거 빈곤의 고통은 잊어버린 채 잘 살게 되고 나서 보니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다' 하는식의 접근 방식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것이고, 사실적으로도 바람직한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제로섬 게임이 아닌 파지티브 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절대량이 100으로 정해져있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될 수 록 가난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규모는 꾸준히 커지고 있고 분배에 있어서 누가 얼마나 더 가져가냐의 차이인 것이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과거 300년 동안의 분석은 통계적인 오류가 충분히 가능하다.

300년 간의 통계를 분석한것 자체는 대단한 업적이지만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피케티의 통계는 조작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피케티의 통계에 나오는 출처들이 불분명하고 검증된 출처가 아니라 임의로 만든 자료를 통해 통계를 만든 것도 많기 때문에 정확성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다.

3) 현대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특히 경제는 자연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한 계가 있다.
과거에 이러한 추세를 통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주장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4) 불평등의 원인은 자본 뿐만 아니라 기술 발전, 사회 정치적 이유 등 다양하게 있다.

5) 정치를 통해 경제를 통제 할 때 생산력,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피케티는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예를 들어서 과세의 2차 효과를 들 수 있는데 세율이 높아질 수록 이는 사람들의 인센티브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 할 동기를 잃게되고 그러면 생산성과 경쟁력이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6) 불평등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하였는데 불평등 그 자체로 경제 성장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사실 인류의 문명 자체가 그런 프로세스를 통해서 발전했는데 원시 시대에 자연의 공포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고 또 더 안전해지기 위해서 더욱 안전한 물건 등을 만드는 사람에게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하면서 인간의 문명은 발전한 것이다.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발전하려고 개개인이 노력하게 되고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개개인의 행동이 전체의 선을 만들어 내는것과 같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의 1차 목적은 가난, 질병, 문맹, 빈곤퇴치이지 평등이 아니다. 평등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일을 안하게되고 경제가 퇴보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결과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7) 인류 역사상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서 부터 빈곤이 퇴치되었고 모든 사람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아문제가 있는데 자본주의는 인류의 기아를 퇴치하였다.

혹자들은 지금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아직도 기아가 많아서 유니세프같은 기구를 통해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 하는데 사하라 사막 이남지역의 기아 문제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부의 총량이 얼마나 늘어나서 절대빈곤, 문맹 등을 퇴치했는가이지, 부의 총량을 신경쓰지 않고 부의 증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느냐를 무시하고 분배에만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단점만을 보는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8) 부자들에게 높은 누진세와 높은 상속세를 걷어야 한다고 하는데 막스는 부루주아지가 프로레타리아를 착취한다는 도 덕적인 명분이 있었고 때문에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피케티의 경우 국가가 어떤 권리로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9) 행복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행복의 제 1조건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행복은 소득과 부의 획득에만 달린 것이 아니며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다면 그 이후의 인생은 스스로가 설계하는 것이지 남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빈곤과 박탈감을 문제삼는것은 옳지 못하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순간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선택해서 사는 인생을 사회탓으로 돌리며 잘사는 사람탓을 하게되면 끊임없이 불행해진다.

10) 제1법칙인 자본소득비율 = 자본수익율*자본/국민소득인데 자본은 가만히 놔둔다고 소득이 나지 않는다.
은행 이자율, 주식 수익율, 채권 수익율 등의 모든 수익율은 리스크 프리미엄을 제거하면 경제성장률에 수렴한다. 때문에 자본 소득비율이 커지려면 자본의 양이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역할과 혁신이 중요한 것이다.

피케티는 기업가의 역할과 혁신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사과 나무를 키울때 아무땅에 사과 나무씨앗을 심는다고 사과나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땅을 고르게 일구고 비료를 주며 물을 주고 기온이 맞지 않으면 비닐하우스를 치는 행동이 동반 되어야만 탐스러운 사과가 열리는 것이다.

11) 제 2법칙인 자본소득비율 = 저축률/경제성장률은 장기관계식으로 1956년 솔로우의 경제모형에서 제시된 공식이다. 피케티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일본을 예로 드는데 일본의 경우 저축률이 15%였고 경제성장률은 2%정도였다. 때문에 일 본의 자본소득비율은 점차 증가하여 불평등이 심해졌다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낮은 것을 흔히들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르는데 원인은 프라자 협약 때문이다. 이때 엔화의 가치가 절상되어 일본의 대외 무역의 흑자가 낮아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확대통화, 확대재정 정책을 하게된다.

돈을 많이 풀게 되면 시중에 돈이 넘쳐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품이 형성되게 되고 부동산과 같은 자산의 가격이 올라간다. 그러면서 불황이 오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구조조정이지만 일본은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잘못된 투자를 돈을 지속적으로 풀면서 끌고간다. 때문에 생산성이 감소하고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2%대로 낮아진 것이지 일본의 저축률과 경제성장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또한 저축률과 경제성장률은 독립관계가 아닌데 저축을 많이하면 자본이 증가하고 자본의 증가는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임금이 올라가고 경제가 성장하게 된다. 서로 독립하지 않은 요소를 독립한것 처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든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솔로우 모형에서 이 공식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 노동완전고용, 자본장비율일정, 저축완전투자 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성립하지 않는 모형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조건들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제 2법칙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12) 제3법칙은 자본수익율이 항상 경제성장률 보다 높다는 것인데 이는 소득 불평등과 상관이 없다.
이 공식은 제 1법칙에서도 말했듯이 기업가의 역할을 전혀 무시한 것이며 또한 제 2법칙에 의해 부정된다.

제 2법칙에 따라 저축률 = 경제성장률/자본소득비율인데 피케티의 주장대로면 소득 불평등이 낮으려면 경제성장률이 자본소득비율보다 커야한다. 그러나 그러면 저축률이 1보다 커지는데 저축률이 1보다 크다는 말은 소득의 100%를 넘게 저축한다는 뜻이고 이는 모순이다.

한 나라의 경제는 과세를하고 분배를 신경쓰고 평등을 주장한다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력과 땀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피케티처럼 기업가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자본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면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다.

기업의 투자가 증가해야 경제가 성장하고 그래야 일자리가 늘어나며 분배구조가 개선되는 것이지 경제가 성장하지 않고서는 분배구조가 개선될 수 없다. 친 시장정책을 펼친 중국, 인도, 라틴아메리카 등은 장하준 교수의 말처럼 불평등이 심화되고 양극화가 심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절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경제의 규모가 커진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시장주의 정책이 문제가 되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양극화가 심해진 것이 아니라 정실주의에 그 원인이 더 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피케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글로벌 자본 과세를 주장하는데 이는 유토피아적인 결론일 뿐이다. 물론 피케티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고 피케티는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 중 다수가 실제로 실현되었다' 라고 했지만 지금 각 국가는 세금을 서로 낮추어 자본을 유치하려는 세금 경쟁을 하고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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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한 인터뷰에서 하이에크가 말하길 자유주의 지식인은 선동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반자유주의 기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지식인이 선동가가 되지 않으면 반자유주의 기조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반자유주의 기조가 강한 이유는 사람을 계급이나 신분으로 나누고 그것에 대한 불합리함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평등, 불합리에 대한 반감이 있기 때문에 신분, 계급으로 나누어지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쉽게 선동되고 분열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분노, 선동, 증오와 같은 감정을 싫어하고 자존감, 개인주의 독립성과 같이 사회탓을 하는 것 보다는 개인의 발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선동가가 되기 쉽지 않다.

막스는 인간을 부루주아지와 프로레타리아로 나누어 분열시키고 선동하였고 피케티는 1:99로 나누어 분열시키고 선동하 고 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글로벌 과세같은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 입각한 실현 가능성이 어려운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라고 스스로 자처한다면 다양한 견해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피케티의 책에 대해 무조건 적으로 수용하기보단 한걸음 물러나 과연 대한민국의 사정에 맞는 책인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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