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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어빈2 2021. 8. 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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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헤르만 헤세
평점 6

개요
<데미안>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의 작품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쓰기 시작해서 전쟁이 끝난 후 출판되었다.

헤르만 헤세가 이미 유명해진 다음 쓴 책이라 스스로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기 위해(?)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출판했다고 알려져있다. 그래서인지 책이 겸손한척 하면서 스스로 잘남을 숨기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 책은 싱클레어(주인공)의 성장 소설이다. 싱클레어의 10살 무렵부터 20대 초반까지를 다룬 책이며, 아마도 싱클레어는 작가 본인을 상정하고 있는듯 하다.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자신이 만나는 주변 인물과의 교감을 통해 가치관이 변하는, 이 책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자면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과정이 이 책의 큰 맥락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연장자로 싱클레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자신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일 뿐 아니라 추구해야 할 이샹향으로 여기고 있다.

내용
싱클레어는 유복하고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셋째이자 장남으로 밝은 세계(기독교적 세계)와 어두운 세계(현실세계)의 경 계에서 두 세계가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 아이다. 또래 아이들보다 웃자란 싱클레어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아 이들도 유복한 싱클레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어느날 또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누가 더 잘났는지를 겨루는 유치한 경쟁이 붙었다. 싱클레어는 거짓말로 자신의 도둑질을 지어내어 영웅적으로 떠벌렸고 이를 지켜본 프란츠 크로머라는 일진이 도둑질을 고발하겠다고 싱클레어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이 때 싱클레어와 같은 반이었던 데미안이 프란츠 크로머의 괴롭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데미안한테 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배우는 등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둘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성장한다. 그러나 데미안이 다른곳으로 가게 되고 싱클레어도 다른 곳에 진학하게 되면서 둘은 멀어지게 된다.

멘토를 잃어버린 싱클레어는 방탕해진다. 그러던 중 데미안을 우연히 만나게 되나 자신의 방탕해진 모습에 데미안은 주인공을 질책하고 떠난다. 이후 베아트리체라는 상상속의 여자를 통해 다시금 마음을 다잡기를 바랬던 싱클레어는 여전히 멘토가 없음에 힘들어 한다.

이때 우연히 오르간 연주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에서 피스토리우스라는 오르가니스트를 알게 되고 그는 싱클레어의 멘토가 된다. 그러나 싱클레어의 깨달음이 피스토리우스를 넘어서는 순간,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찾게 된다.

결국 데미안을 찾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부인도 자신이 찾던 '알을 깨고 나오게 해줄' 이상향임을 알게 되 고 데미안의 집을 수시로 다니며 자신을 함양하던 중 전쟁이 발발해 참전하게 된다. 큰 부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야전병원에 누운 채 환영 속 데미안을 만나며 소설이 끝난다.

느낀점
이 책은 각 챕터별 제목이 기독교 내용일 정도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많은 책이다.

카인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아니라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표적을 붙였다는 이야기, 예수 십자가 옆에 매달려 있던 두 명의 도둑 중 예수를 조롱했던 도둑이 오히려 삶의 일관성에 있어서는 신뢰할 수 있다는 해석에서 기독교 비판이 잘 드러낸다.

이를 통해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라는 본문 속 데미안의 편지처럼, 비판적 사고를 통한 통념의 파괴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종교적 순수성을 찾기 위한 작품이다.

19세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과학이 이를 대체하던 시대다. 서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가 왕가와 결탁하여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사람들은 기독교가 더 이상 변하는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찾게 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말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이다. 이 말을 보통 '기독교는 끝 났다'는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이 말의 뒷 부분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는데 바로 '니들이 죽였다'라고 한다. 기독교를 타락시킨 기득권층에 의해 신이 죽었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오히려 종교적적 순수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고결함, 순수성, 정직함, 겸손함 등 대부분의 긍정적인 '가치'들은 종교에서 나왔다.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수 천년간 탐구했고 이를 '신이 이런 존재이기에 우리 인간은 이를 좇으려고 노력 해야 한다'는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내세 지향적이지만 현세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가치를 통해 인간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해체하고 새로운 도덕률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그 순수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 가지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싱클레어가 두 개의 세계인 '밝은 세계(기독교적 세계)'와 '어두운 세계(현실 세계)'의 경계에서 고민하다가 서 서히 그 두 개의 세계가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양면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 부분이다.

작가는 여기서 종교와 인간을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정의로움'은 신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닌것과 같다. '정의'는 신의 속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정의로움에 가깝게 노력을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정의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전히 종교적 신의 삶을 살 수 없다. 항상 '밝은 세계'의 인간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바로 이 점을 지적함으로써, 우리가 온전히 종교적 삶만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그 양면성을 이해하는 것이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완벽하게 기독교 정수와 동일해야 된다가 아니라 추구 하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는 데미안이 하는 말들이 주는 종교성이다.

싱클레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데미안의 도움으로 부수게 되지만, 데미안의 말은 오히려 훨씬 종교적이다. 특히 책의 후반부에 전쟁이 올 것을 예측하면서 데미안은 지속적으로 유럽의 타락을 지적하고 있는데, 타락했다는 것은 지켜왔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으로 대표되는데, 에바(이브)가 뜻하는 것은 바로 태초의 기독교로 대표되는, 그러나 유혹에 빠지는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것, 즉 기독교적 순수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싱클레어가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을 계속 언급하는 것은 가치에 대한 회귀을 뜻하며 '사랑'이 육체적 사랑이 아닌 더 높은 차원으로 묘사되는 것도 인간의 사랑 이상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1차 대전 중에 쓰였고, 실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책의 서평을 쓴 토마스 만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이는 이 책이 새로운 도덕률을 제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19세기 자유롭던 유럽이 점점 국가주의로 치닫게 되 면서 세계대전으로 휩쓸리던 때 계속 잃어버리고 있던 종교적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메세지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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