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책

[책리뷰] 화씨 451 - 레이 브래드버리

어빈2 2021. 7. 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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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이 브래드버리

평점 6

 

개요

이 책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비견될 정도라는 평이 있는 책이다. 그래서 보게 되었는데 확실히 브래드버리가 제시한 디스토피아는 현실적이다. 책의 흐름도 개연성이 있으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크리스찬 베일의 이퀄리브리엄이란 영화가 떠오를 법한 전개였다. 

 

그러나 책이 좀 난잡하게 쓰였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 주변 환경 묘사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비유를 매 문장 마다 사용하고 있어서 나중엔 '뭘 비유하고 있는거지?'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잡하다. 마치 미숙한 소설가가 좀 있어 보이게 쓴 것같은 현학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런 면에서 부족하지만 책에서 들려주는 사회는 경청할 만 하다.

 

내용

주인공인 몬태그는 방화서에서 근무하는 방화수이다. 방화수란 책을 태우는 직업인데 모든 집이 불에 타지 않는 소재로 만들어 지면서 소방수는 없어지고 방화수가 새로 생겨났다. 

 

정부에서는 책의 소지와 독서를 금지하고 있다. 몬태그는 10년 가까이 방화수를 하면서 무언가 왜곡되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던 중 늙은 여인의 집에 책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하게 되고 집을 태우려는 찰나에 늙은 여인이 책과 함께 자살하는 모습을 보고 책에 자신이 느끼는 왜곡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다음 출동 때 책을 훔치게 되지만 방화수 서장인 비티가 그것을 알아채고 몬태그를 의심한다.

 

몬태그는 집으로 와서 이미 책을 거부하고 텔레비젼의 말초적 감성에 의존해 살고 있는 아내인 밀드레드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비티 서장은 몬태그를 찾아와 몬태그를 설득하고 협박하는데 그 방법이 온갖 책 속의 말들을 인용하는 것이다. 

 

즉 비티 또한 과거에 몬태그와 같이 흔들린 경험이 있으며 책을 보고도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몬태그는 비티 서장을 죽이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책을 태우는 분서 갱유의 사회. 인간의 역사에 책을 태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먼 옛날의 진시황의 분서갱유부터 마오쩌둥의 홍위병 시절까지, 고작 40-50년 전에도 사람들은 책을 광장에 쌓아두고 태웠다. 

 

그런데 화씨451의 방화수는 역사에서의 분서갱유랑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독재자가 자신의 지식을 독점하는 닫힌 사회에서 진리의 독점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다른 주장을 하는 책을 태우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다면 화씨 451에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책을 태운다.

 

화씨451에 나오는 정부는 독재정부가 아니라 민주주의 정부다. 

 

그럼 왜 책을 태우는 것인가. 

 

사람들이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방송에서 나오는 말초적인 정보를 더 선호하고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은 세줄, 한 줄로 설명되기 시작하고 한 줄로 표현되는 고전은 결국 아무 의미도 없기에 사람들은 책 그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진리가 자유시장에서 승리하지 못 하고 패배하여 결국 하나의 거짓된 진리가 남는, 독재자가 독재를 위해 책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결과적으로 독재자를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거 조차도 잘 생기고 말 잘하는 사람을 뽑는 초등학교 반장선거 수준의 민주주의를 한다. 

 

결국 정부에선 시민들이 원하는 말만 하고 언론도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만 전달한다. 

 

전쟁이 발발하려고 하는데 전쟁은 시작 초기에 간단히 끝날 것이고 아무도 전쟁에서 사망하지 않는 압도적 승리를 텔레비젼에서 떠들지만 결국 도망가는 몬태그의 등 뒤에 펼쳐진 도시위로 핵폭탄이 떨어지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

 

느낀점

인간은 왜 자유의 끝에서 절벽으로 떨어지는가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있다. 

 

대체적으론 인간 본성에 개인보다는 집단에 속했을 때 안도감을 느끼고 개인의 고귀한 도덕이 집단 행동 속에서 무뎌진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보장되면 자유 속 개인을 두려워하고 결국 그 끝에서 군중심리에 휩쓸려 잘 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까지 단 한 번도 법을 어기지 않았고 독일인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 결과 치명적인 인류사의 광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화씨 451은 인간의 나약한 부분이 결국 그 길을 걸어간 사회를 그리고 있다.

 

진리가 자유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전제조건들이 있다. 진리는 자유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에서 거짓들을 이기고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닫힌 사회라면 불가능하다. 

 

진리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인 진리를 알지 못 하기에 비판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진리에 다가서는 그 방향성을 중요시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유로운 도전과 갈등이 제한된다면 이는 닫힌 사회고 그런 사회에서는 필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저급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 생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기본 조건은 이런 과정을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수준 높은 시민의식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화씨 451에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 브렉시트를 왜 영국 사람이 찬성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른다. 

 

'영국이 대영제국의 부귀영화를 꿈꾸고 이민자를 받기 싫어서 했다.' 

'영국 사람들은 다 바보다.' 

 

정도 밖에 모르는게 사실이고 사실 그 이상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으로 결론 내고 위안을 삼는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실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도 트럼프같은 '미치광이, 또라이, 차별주의자'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미국사람들이 다 미쳤기 때문이다. 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국제적 이슈뿐만 아니다. 

 

'요즘 신문같은거 누가 보나요?'라고 하면서 본인은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고 페이스북 하고 휘발성만 존재하는 카드뉴스를 본다. 카드뉴스의 경우 몇 문장과 그림으로 세상을 설명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물어보고싶다. 그러나 그것 또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글이 있으면 세줄 요약을 요구하고 요약이 없으면 읽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특정 정치색을 갖고 있는 언론사에서 카드 뉴스로 얼마나 쉽게 선동 할 수 있을까. 

 

광장에 나와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 정의는 실현되어야하고 이는 마녀사냥이 아닌 법치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광장에서 외치는 것은 마녀사냥일 뿐이고 이는 전체주의의 전조이다. 

 

1984나 이퀄리브리엄 등 수 많은 전체국가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소설, 영화들이 가치가 있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 국가가 위험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간의 경계가 매우 얇고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미묘한 차이를 알고 항상 지켜봐야한다는 것이다. 

 

광장에 나와서 최순실이 얼마나 극악한 사람인지를 욕하는 것은 옆에 있는 중학생들도 할 수 있다.중요한 것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시진핑과 아베가 정권연장이 확실시 되는 마당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박근혜대통령의 국가도 아니고 최순실씨의 국가도 아니며 영속성이 있는 국민들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모든게 정지되어있다. 가히 레이 브래드버리가 대한민국을 보고 이 책을 쓴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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