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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워터멜론 슈가에서 - 리처드 브라우티건

어빈2 2021. 7. 5.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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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리처드 브라우티건

평점 6

 

내용

워터멜론 슈가라는 평화로운 마을에 주인공이 살고 있다. 목가적인 이 마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사는 사람들도 평온하고 따뜻해 보인다. 

 

워터멜론 슈가 마을은 아이디아뜨라는 작은 중심지와 그를 둘러 싼 사람들이 사는 오두막들, 외곽에 끝없이 펼쳐진 풀 한 포기 없는 포가튼 워크스로 구성 되어있다. 

 

주인공인 나는 책을 쓰는 중인데 마가렛이 짜증나게 한다. 마가렛은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로 주인공과의 성향차이로 헤어졌으나 받아들이지 못 하고 힘들어한다. 

 

그 성향이란 주인공은 워터멜론 슈가의 평화로움을 좋아하는 반면에 마가렛은 포가튼 워크스에 자주 가서 거기에 있는 '잊혀진물건들'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인공은 마가렛의 절친한 친구이며 매우 아이디아뜨적인 풀린과 사귀고 있으며 마가렛이 자주 포가튼 워크스에 가 있는 것을 싫어하고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포가튼 워크스에 사는 인보일이 아이디아뜨의 허상을 무너뜨리고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선포를 한다. 인보일은 원래 워터멜론 슈가에 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이 마을은 역겹고 진실을 회피하고 있다고 하면서 포가튼 워크스로 떠난 사람이다. 

 

그러자 아이디아뜨의 큰 어른이자 인보일의 친형인 찰리가 그들에게 그 진실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디아뜨에서 의미있는 장소인 송어 부화장에 단체로 와서 집단 자살을 한다. 송어 부화장이 의미있는 이유는 워터멜론슈가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던 호랑이들을 사람들이 다 죽이고 마지막 호랑이를 화장한 자리에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보일들은 다 죽게되고 그들을 포가튼 워크스에 화장하러 가는데 그 때 그들의 자살 소식을 안 마가렛도 결국 자살하게 된다.

 

개요

책의 줄거리가 좀 이상하다. 이 책 자체가 조금 이상하다. 

 

원래 소설을 잘 못 읽어서 도대체 이 소설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몰랐는데 역자 후기를 보니 작가가 1960년대 소위 말하는 68문화혁명 시기의 작가였다. 즉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반문명, 반자본주의 적인 좌익 사상을 가진 작가가 되겠다. 

 

이 책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포가튼 워크스를 반대하고 목가적인 아이디아뜨를 이상향으로 보며 책에 나오는 숭어, 호랑이는 자연의 자애롭고 평화로운 면과 자연의 가혹한 면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 부분에 착안해서 책을 다시 읽어보고 느껴보았다.

 

느낀점

이 책에서 특별하게 느낀 점은 서술 방식이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를 표현하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 이유는 영화 자체는 훌륭한데 폭력을 표현하는 방식을 너무 일반화 시켰다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영화 속에서 마치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그런 부분이 폭력을 굉장히 미화한다. 

 

물론 현실의 폭력성은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화 되어 있다는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크지만 나는 그것이 싫다.

 

이 책도 도중에 매우 그로테스크한 두 장면이 나오는데 그 두 장면이 이 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주인공이 어릴 때 호랑이가 멸종하기 전 호랑이가 주인공이 테이블에서 산수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주인공 집에 들어와 부모를 잡아먹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보일들이 송어 부화장에서 집단 자살한 것이다.

 

호랑이 두 마리가 집에 들어와서 부모를 잡아먹는데 주인공은 어린 아이라서 잡아먹지 않고 주인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모를 먹는다. 그 때 주인공이 저들은 내 부모라고 하자 호랑이들은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주인공에게 부탁할게 없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주인공은 그 상황에서 산수 숙제 중 모르는 것을 물어본다. 호랑이들은 산수 숙제를 도와주면서 계속 뜯어먹는다. 

 

소설은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자연 소설이지만 그 이면에 자조적인 모습이 있는데 소설이 전체적으로 탁함을 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보일들은 아이디아뜨의 송어 부화장으로 와서 그 도시의 진실을 보여준다고 하며 자살을 한다. 근데 그 방식이 단체로 엄지 손기락을 자르고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르고 쓰러져 과다출혈로 죽는 것이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인보일은 아이디아뜨의 허상은 호랑이를 멸종시키고 그 마지막 호랑이의 시체터에 송어 부화장을 지은 것이라고 절규한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을 연결하면 이 책의 주제가 나온다. 

 

호랑이는 가혹한 자연을 상징한다고 한다. 자연 재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의 호환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1900년대 초까지 호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문명의 발전과 맞물려서 사라지게 되었다. 

 

즉 인보일이 자살까지 하면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아이디아뜨의 사람들은 자연의 두 가지 모습 중 가혹한 모습은 경멸해 마지않는 (기계)문명으로 해결 했고 자연이 으스러진 그 장소에 또 다시 자연을 통제하는 문명의 산물인 송어 부화장을 지어 놓고선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송어를 보며 기억하고 찬양하며 자연의 공포를 해결한 문명을 뜻하는 포가튼 워크스를 무시하는 것이 코메디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디아뜨의 허상과 구역질나는 모순을 외면하기 위해 포가튼 워크스(문명)와 인보일들을 외부의 적으로 설정 해놓고 자신들의 고결함을 위해 면책하는 행동들을 하는데 인보일은 이것을 못 견딘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은 송어도 호랑이도 다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랑이를 외면하고 싶어한다. 

 

사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됐으며 이는 문명 발전의 근원을 호랑이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장면이 호랑이에게 가족을 잃으면서 동시에 그것들에게서 산수를 배우는 장면이 뜻하는 바이다. 

 

그러나 호랑이를 없애고 나서는 마치 원래부터 호랑이는 없었고 우린 기계문명을 반대하며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삶을 찬양한다고 한다.

 

그런 결과 조차 문명의 결과라는 것을 잊고 그것들을 심지어 공격하는 모습들에서 인보일은 엄지손가락을 자르고 코와 귀를 자르고 과다출혈로 자살한다. 

 

코와 귀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지손가락은 아마도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손이며 손 중에서도 엄지손가락 때문이라고 하는 말이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꿈 꾸던 이상향은 결코 그 결과로써만 존재할 수 없다는데 대한 자조가 된다.

 

사실 계몽 이후 지식인들은 이성적인 인간에 의한 세상을 꿈 꿨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인재를 통해 도대체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합리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오히려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많이 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참혹함 속에서 그들이 자괴감에 빠져 반문명을 주장한 것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럼 다시 동굴로 들어가서 천둥 번개에 몸서리치는 그 시절을 받아들일 수 있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력의 문제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리차드 브라우티건은 꽤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했지만 그 해결책으로 자조에 가까운 포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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