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사회

소통과 화합

어빈2 2021. 5. 1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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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스샷 남겨놨었는데, 상황이 재미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장면인데, 아이가 우체국이 어디있는지 묻자 아저씨가 '응 알아' 하고 가버리는 장면이다. 서로 한국말을 하고 있지만 소통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인 언어와 주관적인 언어로 소통한다. 객관적인 언어는 예를 들면 '태양'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갖고 있는 태양에 대한 합의가 있고 이에 공감하기 때문에 우리는 태양에 대해서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디테일로 들어가면 태양 조차도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는데, 예를들어 내가 보는 태양과 니가 보는 태양이 동일한 태양이냐는 인식론적 문제가 있고, 우리가 명징한 진실에만 의존하여 소통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소통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인간은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과 환경이 있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는 태양은 다르지만, 일몰 시간 해가 지평선 넘어로 조용히 그러나 붉게 져 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대부분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 아름다움의 크기와 색깔은 모두 다르지만 '석양이 아름답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이를 상호주관성이라고 설명했다.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이나 정의를 가지고 있고 이를 공감하고 인정함으로써 주관성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적인 소통과는 다르게 사회의 소통은 어떨까.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의 소통은 피할 수 없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같은 언어를 하고 있느냐가 된다. 상호 주관성이 있냐는 것이다.  마을 단위의 공동체(시골)을 보면 사람들은 누가 어느집에 사는 아들 딸인지를 빤히 알고 있다. 어떤 경사가 있고 어떤 우환이 있는지도 알고 TV를 무슨돈으로 샀는지, 에어컨은 누구 돈으로 사왔는지도 들여다 보고 있다. 

 

전근대적 공동체엔 태생적인, 또는 한계적으로 상호주관성이 있기 때문에 소통과 화합이 가능하다. 그래서 마을에 어떤 사고가 생겼을 때 대충 이야기만 들어도 어느집 아들이 사고쳤구나를 바로 감잡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마을을 넘어 도시의 동, 구, 시 단위로 가면 어떨까? 구로구와 영등포구를 합치면 북한의 경제규모보다 크고 강남구는 그 자체로 북한보다 크다. 이 말인 즉, 누가 어느집 아들이고 나발이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익명성 때문인데, 이 덕에 우리는 자유를 느끼기도 하고 도시의 차가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서로 공유하는 가치가 없는 도시에선 마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런 곳에서는 두 가지 방식의 소통이 가능한데, 하나는 자연법(원칙)에 의한 소통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가 각자의 취향에 맞는 공동체를 선택하는 소통이다. 전자는 시민적 소통이고 후자는 인간적 소통이라 할 수 있다.

 

시민적 소통은 예를들면 대통령의 소통이다. 현 대통령은 입만 열면 소통을 강조하지만, 대통령과 우리의 소통은 오직 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통령이 쇼를 한답시고 시장을 방문하여 상인들과 나누는 것이 소통이 아닌 연출된 역겨움에 불과한 이유는,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보와 시민이 갖고 있는 정보의 불균형이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말하는 고충이 대통령은 단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새로운 것일까? 다 알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얽혀있어서 쉽사리 손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인간적 소통이란 우리가 취미가 맞는 동호회에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이다. 현대 사회의 공동체는 사는 지역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생활권이라면 내가 찾아가는 형태이다. 취미가 같을 뿐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이 두 가지 소통방법이 뒤섞인 잡탕이다. 모두가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지만, 거대한 사회에서 소통과 화합은 엄밀하게 말하면 비법치적 사고방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좋은말로 소통과 화합이지 이는 인맥, 혈연, 학연의 불공정한 관계를 '의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리라는 사적 관계는 공의에는 반할 수 있는데, 친한 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비밀을 지켜주었는데, 그 비밀이 법에는 어긋나는 행동들이 그 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지극히 의리에 입각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는데, 정확하게 의리가 공의와 경합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소통을 악용하여 자기 말을 들어주기 전까지 소통이 안된다고 떼쓰는 경우이다. 탄핵 전만 해도 틈만나면 광화문 광장을 장악하고 떼써온 그룹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일은 하기 싫고 돈은 더 많이달라'는 내용이다. 

 

소통과 화합이 무엇인지, 보다 냉철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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