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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윤치호일기) - 윤치호

어빈2 2025. 4. 8.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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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치호
편역 김상태
평점 9
 

개요

이 책은 조선 말~일제시대를 온전히 살았던 당대의 명사이자 기독교 감리교의 대부였던 윤치호의 일기를 편역자가 발췌하고 해설한 책이다.

좌옹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16일 ~ 1945년 12월 9일)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대표적인 지식인, 정치가, 교육자다. 개화기와 일제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그의 생애는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논란도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왜 논란이 많은가?
 
그가 조선 계몽운동의 선봉에 선 애국자이자 동시에 일제시대 말기에(38년 이후)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윤치호의 일대기를 간단히 써보자면,
 
1881년 10대 중반에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에 따라 요코하마에서 영어를 배웠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 장군의 통역관으로 조선 정치에 데뷔하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윤치호는 개화파로 지목되어 국내에 더 있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푸트 공사의 추천서를 들고 상하이 미국 총영사관을 찾아가 7개월 동안 미국 남감리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7년 세례를 받아 조선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신자가 되었는데, 훗날 조선감리교의 대부로 발돋음하는 디딤돌이 되었다고 한다. 

1888년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의 벤더빌트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으며,

1891년엔 에모리대학교에 입학해 인문사회학을 공부하였다.

1895년 일본, 중국, 미국에서 총 11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897년 독립협회 설립에 참여하고

1898년엔 회장이 되어 주도하게 된다. 이때 계몽적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으나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그 꿈을 포기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애국계몽운도을 주도하였고

1906년 대한자강회 회장, 한영서원 설립

1908년은 안창호와 함께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냈다. 

1910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아

1915년까지 복역하였으며 

1945년 10월 81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조선 YMCA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윤치호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는, 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87년까지는 한문으로, 89년까진 국문으로, 그 이후부터는 영어로 일기를 썼다. 
 
이 책은 그의 일기 중 1919년부터 43년까지의 일기를 편역자가 발췌하여 주석을 달아놓은 책이다. 
 

내용

목차는 아래와 같다. 
 
제 1부 3.1운동 전후
  제 1장 - 내가 3.1운동을 반대하는 까닭은(1919년)
  제 2장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1920-21)
  제 3장 -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라(1922-30)
 
제 2부 만주사변 전후
  제 1장 - 힘이 정의다(1931-32)
  제 2장 - 나는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1933-35)
 
제 3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전후
  제 1장 - 흥업구락부 사건의 와중에서(1938)
  제 2장 - 내선일체만이 살 길이다!(1939-40)
  제 3장 - 유색인종의 해방을 위하여(1941-43)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기를 직접 발췌하여 내용을 채우고 그에 대해 내 생각을 적는 것으로 내용 파트를 갈음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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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3.1운동 전후

제 1장 내가 3.1 운동을 반대하는 까닭은
 
1919년 당시 윤치호는 일제의 조선 정책에 상당히 분개하고 있었다. 사회경제적으로 공공연하게 수탈과 차별을 시행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특히 토지강탈과 조세정책, 민족차별정책을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또한 일제의 자본과 기술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에게 더 득이 된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어서 일제가 만드는 철도와 도로, 관개사업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나고 열강들을 상대로 외교 운동을 추진해달라는 최남선, 신흥우, 송진우 등의 요청을 거부하였는데, 이유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무대에서 외교운동을 통해 독립을 얻는다는 구상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식은 매우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3.1 운동과 1920년대 이후의 무장투쟁에도 반대하였는데, 조선인의 실력양성을 통해 도덕적으로 먼저 독립하여야 비로소 정치적으로 독립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성실, 정직, 신용, 공공정신, 노동존중 등의 덕목을 우선 함양하여 민족성이 개조되어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는 그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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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17일
중앙학교의 송진우 교장이 찾아왔다. 그는 국제연맹이 실제로 창설될 것이며 약소국에게 자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기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납득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1) 거창한 이상이 모두 그렇듯이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실제 활동에 들어가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다. 2)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3) 열강 중 어느 누구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4) 미국이 단지 조선에게 독립을 안겨줄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송 교장은 내가 일본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두 가지를 느꼈는데, 1)실제 윤치호의 말처럼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은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고, 열강 중 누구도 일본을 거스르면서까지 조선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윤치호가 바라본 국제 인식이 매우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을 두고 언젠가는 미국과 일본이 충돌할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독립 기회가 올것이라고 예견하고 미국을 대상으로 외교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은 윤치호보다 더 멀리 내다본 당대의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1919년 1월 23일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10퍼센트의 이성과 90퍼센트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서울의 조선인들은 고종 황제의 승하에 대해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고종 황제의 통치가 어리석음과 큰 실수들로 점철된 지긋지긋한 통치였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고종 황제의 승하야말로 조선의 자결권이 끝내 소멸됐다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넷상에 떠돌아다니는 윤치호의 명언 중 하나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조선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사실 이런 민족이기 때문에 윤치호는 조선인의 계몽을 그렇게도 주장했던 것이다. 
 
윤치호는 고종과 민비에 대해 굉장히 심한 반감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재 우리가 고종과 '명성황후'라고 치켜세우는것이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인식과 상당한 거리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 1월 29일
최남선 군처럼, 우리가 일본의 통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파리강화회의에 알리는 게 조선 독립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것 같다. 바보들 같으니! 왜? 이유는 이렇다.

1)계약(한일합병조약)을 통해서 조선의 악정이 일본의 유능한 행정으로 대체되었다는게 너무나 잘 알려져있어서, 조선의 상황이 종전보다 더 열악해졌다는 걸 파리강화회의에서 납득시키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 만큼 다른 열강의 군사력에 제압되지 않는 한 조선이 독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영국이 하찮은 조선을 독립시킬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할까?

3) 역사상 투쟁하지 않고서 정치적 독립에 성공한 민족이나 국가는 하나도 없다. 싸울 수 없다면, 독립을 외쳐봐야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제시대 15년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것이 비록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 하더라조 조선왕조보다 나은 시스템이었다는게 윤치호의 인식이다. 싫든 좋든 일본을 통해 근대 시스템이 들어왔다는 말이다.

1889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익선론을 발표하면서 조선은 일본 입장에선 진정으로 중요한 주권문제가 되었다. 조선이 일본에 적대적인 나라에 복속되거나 협력한다면 지정학적으로 조선의 위치는 일본의 목을 찌르기 때문이다.

고종의 러시아를 끌어드리려는 끊임없는 외교실책은 일본과 당시 헤게모니 국가였던 영국을 자극했고 결국 열강의 동의하에 조선은 일본에 병합된다. 즉 조선 병합은 국제사회가 동의한 국제적 사건이었고, 독립을 위해 회의에 참여한다거나 만세를 외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를 윤치호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자강을 강조했던 것이다.

1919년 2월 26일
서울의 모든 중등학교 학생들이 고종 황제의 인산일(3월 3일) 1~2일 전에 동맹휴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는 것, 상당한 지위와 명성을 갖춘 모 인사가 이 음모의 배후 인물이며 그의 지력을 신호로 일제히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는 것, 비폭력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는 것...

어리석은 소요로 말미암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인을 더더욱 가혹하게 다룰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얻게 될까봐 두렵다. 

3.1운동은 고종 황제의 인산일에 맞춰, 특히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작되었다는 관점이 있는데, 윤치호도 3.1 운동이 고종황제의 인산일에 맞춰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1919년 2월 28일
아침 8시부터 식구들과 함께 장례식 습의(예행연습)를 보았다...
장례식에서 거행되는 각종 의식과 여기에 사용되는 의복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유치하다. 이런 것들은 인류 사회가 유아기 단계에 있었던 2천여 년 전부터 줄곧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새들처럼 날아다니는 판국에, 아니 새들보다 더 잘 날아다니는 판국에, 이런 얼빠진 형식에 얽매어 있다니!

이웃들은 하늘을 날고 있는데 우리는 땅을 기어다니면서 감히 독립을 운운할 수 있는건가?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1919년 3월 2일
오후이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방한승 기자가 찾아왔다.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최근에 조선 청년들에게 말해왔던 것을 거듭 말했다...

4) 약소민족이 강성한 민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자기 보호를 위해 그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 5) 학생들의 이 어리석은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6) 천도교 인사들 같은 음모꾼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3.1 운동 이후 윤치호는 이를 소요사태로 보고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가 잘 나와있다. 이후 여론이 매우 나빠지면서 윤치호는 조선인 모두에게 욕을 먹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소요사태는 반대하면서도 조선인의 불만을 일본 고위 관료들에게 꾸준히 전달하면서 차별정책을 멈춰줄 것을 호소한다. 

의외로 천도교, 즉 동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인이어서 그랬던 점도 있겠지만, 안중근이 동학을 토벌하고 다녔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동학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동학은 손병희의 주도하에 일진회로 바뀌는데 병합을 주도했던 단체인만큼, 천도교 세력이 친일파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1919년 8월 29일
상하이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몇 개의 분파로 쪼개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면, 독립을 외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1919년 9월 12일
난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해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근현대사에서 임시정부와 무장독립투쟁을 일종의 메인스트림으로 배운다. 그리고는 허무하게도 그들이 중국 땅에서 얼마나 왔다갔다 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무장투쟁을 했는지를 배우는데, 나는 지금도 그 한국사 수업을 잊지 못한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실제로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가 독립했을 때 그들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우리가 여기까지 온데는, 미국의 도덕성을 계속 공격하고 외교적으로 이득을 취하려 했던 이승만과(결국 대한민국은 미국이 만들어준 나라가 되었다), 국내에서 끊임없이 조선인을 근대인으로 교육하는 작업을 한 윤치호 같은 사람들 덕분이 아닌가? 
 
독립운동자금을 달라고 찾아온 사람에게 일침을 가하는 윤치호의 말에는, 오히려 무장독립투쟁을 한 사람들의 비겁함이 잘 드러나있다고 생각한다. 

1919년 9월 15일
일본이 조선에게 독립을 되돌려주었다고 가정해보자
1) 융단 위에 앉아있는 곤충처럼 아주 편안하게 전국 방방곡곡에 정착해있는 33만명의 일본인을 우리가 조선 반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2) 일본이 조선에 견고하게 설치해놓은 모든 철도, 항로, 전신, 전화, 은행, 공장, 농장 등을 우리가 모조리 사들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3) 영토권과 그에 수반된 권리, 그리고 치외법권 등을 우리가 폐기할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4) 우리가 영토를 수호하고 법을 집행할 수 있을 만큼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막강한 육군과 해군을 창설해서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1919년 9월 16일
어제의 문제를 계속 생각해보자
5) 우리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가는 일본 이주민을 막고, 우유와 돈이 넘쳐나는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6) 우리가 친일파, 친미파, 기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파벌로 분열되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단결할 수 있을만큼 애국적인가? 별로 그런거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명목상의 독립이 조선인의 진정한 복지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그래서 난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낱 이름뿐인 독립을 얻는 것보다는 자치를 해가며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는 게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윤치호의 생각이 아주 잘 드러난 부분이다. 국제 정세가 힘에 의한 질서라면, 오히려 일본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 명목상 독립을 얻는것 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게 이상할게 없는게, 바로 조선왕조 500년도 중국의 번국으로서 이렇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사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도 한미동맹이라는 미국 우산 아래에서 힘을 길렀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19년 10월 26일
남궁벽이라는 한 청년이 내게 편지를 보내 도쿄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조선 민족이 현재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10년 쯤 더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얘긴가? 난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다음과 같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조선 민족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주요인 중 하나는, 지식인이나 지도자들이 수백년 동안 유교 윤리와 불교적 이상에 관한 허황된 철학적 사색에 탐닉해 유용한 기술과 실용적인 도덕을 완전히 무시했던 점이라는 것 말이다. 난 도쿄에서건 다른 어디에서건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조선인 학생에게는 결코 동조할 수가 없다. 

윤치호는 유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길 바랐고, 기술과 과학으로 조선을 보다 근대화 하기를 바랐다.

윤치호가 국내에선 학교를 설립하고 밖으로는 유학생들을 도와준 이런 기록과 흔적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30년대 말 그의 변화가 더 가슴 아픈것 같다. 
 
제 2장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1920년 8월 14일
한편 조선인은 쓸데없는 선동을 멈추고 대중의 정신적, 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만세를 외치는 알량한 거지들이 조선에 독립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비참한건, 설령 독립이 이루어지더라도 무지와 가난에 찌든 대중에겐 독립을 유지해나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1920년 8월 17일
경찰 당국이 미국 의원시찰단의 방문에 즈음해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이 가는 인사들을 추척해서 체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오늘 발행된 동아일보가 보도했다...미국 내의 반일 감정을 조장하려고 약간 명의 방문객을 죽이는 계획도 들어있다고 한다...
방문객의 신변에 뭔가 문제가 발생한다면 조선 독립의 대의명분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손상을 입을 것이다. 

외국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조선 독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는 이승만도 동일하게 갖고 있던 생각인데, 동시에 현대의 한국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구를 그리도 좋아하나보다.
 
사실 외국인을 암살한다는 것이 카타르시스를 줄 수는 있겠지만, 처지 향상에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 윤치호도 그 전에 언급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조선 병합이 가속되었다는 말을 하며, 외국인을 죽이는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20년 8월 30일
안창호씨가 지역감정의 소유자여서, 기호인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을 것 같으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차례 들었다. 서북인은 기호인에 대해 커다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창호 같은 지도자가 마음 속에 분파적인 편견을 품고 있다는 얘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 한 가지만으로도 조선인이 아직 독립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치호는 끊임없이 서북인과 기호인의 지역감정을 비판한다. 지금이야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이가 안좋다지만, 이전엔 기호인(서울경기)와 서북인(평양)의 사이가 굉장이 나빴다고 하며, 이 지역감정 얘기는 일기의 도처에 언급되고 있다. 

1920년 10월 8일
고모님 장례식에 참석했다...곡소리도 굉장히 컸다. 물론 이 곡소리의 대부분은 남을 의식한 것이다...조선인은 종종 장례비용 떄문에 파산하고 만다. 요컨대 조선인의 장례식은 의미없는 의식, 눈물 없는 애도, 분수에 넘치는 비용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사실상 현대의 결혼식을 보는 것 같다. 윤치호의 이런 자조스러운 조선인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지금도 전혀 나아진게 없음에 서글픈 마음이 든다. 

1920년 12월 6일
조선경제회 후원으로 신구불온사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에게 강연했다. 청년들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볼셰비즘에 섣불리 빠져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내가 볼셰비즘을 비판하자, 여기저기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21년 1월 22일
조선인이 그토록 쉽게 볼셰비즘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대체 뭘까?
1)...조선인에게 남다른 한 가지 재능이 있다면 그건 기생 본능이나 심리, 즉 더부살이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제는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더 나아가서는 사회주의라는 미명하에 남들에게 얹혀살고 있다.
2) 수백년 동안의 기생심리로 인해 자구 의식과 남자다운 생존경쟁 정신이 뿌리 뽑혔다.
3) 부패한 조선왕조 치하에서 조선인이 부자가 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좀 더 자애로운 일본 치하에서 조선인이 최소한의 생존수단을 찾기란 점점 불가능해져가고 있다. 조선인은 이 끔찍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그래서 볼셰비즘을 환영한다. 

윤치호는 공산주의를 극혐했다. 그러나 이 책에선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이유가 뚜렷히 나와있진 않다. 일본도 공산주의를 혐오했는데, 아마 그런 부분에서 윤치호와 일제의 이해관계가 맞았던 부분이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21년 2월 10일
돈 가뭄이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 현재 조선에는 농작물이 종전 가격의 3분의 1에 팔리는지 4분의 1에 팔리는지 조금도 관심이 없는 세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누군가에게 돈을 뜯어내는 일뿐이다. 

이들은 1)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녀자, 2)탐욕스러운 식객, 3)이른바 '애국자'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정녕 양식 있고 충정 어린 정부라면, 우선 모든 조선인들을 밤낮으로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자기들의 자금 확보 방식을 포기하겠노라고 대외적으로 천명해야 한다. 사람 목에 권총을 들이대고 돈을 요구하는 건 정부 요원이 할 일이 아니라 강도나 할 짓이다. 이른바 조선인 갑부들을 골라서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주지 않는다고 죽이거나, 억지로 자금을 대게끔 해서 그로 인해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만드는 건 모든 조선인들을 거지 신세로 전락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애국심이라면, 이것이 국민에 대한 봉사라면, 이것이 독립이라면 주여, 우리를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해주옵소서!

1921년 2월 16일
...설령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끝나야지, 의견이 다르다느느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조선의 역사, 특히 지난 50년간의 역사가 당파 간의 상호 살육이라는 치욕스러운 기록의 연속이었다는 점이 서글프기만 하다. 

정의를 외치면서 남을 뜯어먹고, 끝도없이 분열하고 분파되며, 의견이 다르다고 남을 죽이고 사회적으로 말살하는 모습에서, 민주주의가 싹 틀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허망하다.

1921년 6월 4일
이조 500년 동안 서북인은 정치적 박대와 모욕적인 차별을 받아왔다. 서북인이 기호인, 특히 지배 계층으로 군림했던 기호인을 증오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복수심을 실천에 옮길때인가? 조선인 모두가 자기의 적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언제쯤 단결된 민족이 되겠는가?

 
제 3장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라

1923년 6월 3일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다윈의 이론에는 다소 위안으로 삼을 만한 구석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류를 창조했다는 교리보다 다윈의 이론을 믿을 경우, 인간의 본성이 야비한 이유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5년 10월 2일
어제 일본인은 시정 기념일을 맞이해서 조선인에게도 이를 경축하도록 강요했다. 물질적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이 최근 15년 동안에 한 일이 조선인이 1500년 동안에 한 일보다 더 많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일본이 일본인을 위한 조선을 만들려는 시책을 냉혹하게 차곡차곡 완성해나가는걸 지켜보면서 조선인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대체 뭘까?

1929년 1월 24일
조선 양반의 기본 생활법칙은 이렇다.
1) 밥 먹을 때와 글씨 쓸 때 빼고는 손 하나 까딱하지 마라. 이것이야말로 조선인에게서 나타나는 게으름의 어머니다.
2) 모든 사람이 내 시중을 들도록 만들라. 남들 시중을 들 생각은 마라. 이것이야말로 조선인이 갖고 있는 이기주의의 아버지다.

1929년 2월 11일
무솔리니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그는 대단히 유능하고 정직하고 상식있고 정력적인 사람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중국, 소련, 인도, 조선에도 무솔리니 같은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낭만적인 국제주의, 짐승같은 볼셰비즘, 구역질나는 사회주의 같은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무솔리니같은 사람은 호전적인 민족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와 같은 사람이 조선에 등장한다는건 불가능해 보인다. 

1930년 1월 15일
...하지만 이런 식의 시위로 뭘 이룰 수 있을까? 수천 명의 학생이 아니라 2천만 조선인 모두가 오늘 내내, 아니 올해 내내 만세를 부른다 하더라도, 일본인의 시책을 조금이라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만세를 외친다고해서 겁날 만한 건 전혀 없으니까.

 

제 2부 만주사변 전후

30년대 들어서도 윤치호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도 윤치호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쿠데타라고 군국주의 노선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이 만주를 장악함으로써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의 지위가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일본의 만주 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약육강식의 국제 논리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받아들였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스스로 놓아버리게 된다. 즉, 일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힘이 곧 정의이기 때문에, 일본이 나빠서라기 보단 인간 본성이 원래 그렇고 국제사회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고 합리화하게 된 것이다. 
 
제 1장 힘이 정의다

1931년 1월 8일
하와이, 미국, 시베리아, 만주, 상하이 등 사실상 조선인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조선인을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갈라놓은 두 파벌이 - 서북파와 기호파 - 이제는 서울에서 더욱더 적대적인 양상을 연출해가고 있다. 서북파의 지도자인 안창호씨가 이런 말을 했단다.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1931년 4월 17일
모든 조선인이 퐁풍우가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한 배를 타고 있는데, 안창호 같은 인사가 어떻게 이 하잘것없는 분파정신과 증오심을 고취할 수 있는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1931년 7월 3일
만주에는 조선인 농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네 부류의 암적 존재가 있다. 중국인 관료, 중국인 마적, 조선인 볼셰비키, 그리고 조선인 애국자 말이다(독립운동가를 뜻함).

지역감정이 더욱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윤치호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불신도 커져가고 있다.

1931년 10월 17일
국제연맹은 일본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국제연맹위원회의 옵서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만주 문제를 국지적인 사안으로 축소시키고자 했던 일본의 희망과는 달리, 만주 문제는 빠른 속도로 국제 문제로 비화되고있다...
만일 일본에게 잘못이 있다면 다른 모든 강대국에도 잘못이 있는 것이다. 또 강대국이 옳다면, 일본 역시 옳은 것이다. 단 하나의 관건은 이것이다. 일본이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냐 하는 것 말이다. 

1932년 2월 22일
난 조선의 애국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만주정책이 성공하길 빈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게 되면 그 광활한 땅의 도처에 살고 있는 수백만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이 안전해질 것이다. 
2) 만주라는 큰 보고를 차지해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일본인은 조선에 있는 조선인을 대우하는 데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적잖이 관대해질 것이다. 
3) 일본 치하의 만주는 조선인 고학력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4) 재만 조선인이 수백만에 달하게 되면, 그들 사이에서 대규모 사업을 일으키는 이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932년 7월 15일
오후에 안창호씨가 수감됐다. 이광수 군 요청으로 4시 30분쯤 안씨를 면회했다. 그건 그렇고, 김활란 양이 내가 안씨 석방을 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에 분개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승만계와 서북파를 이끌고 있는 안창호계 간의 볼썽사나운 다툼이 마침내 서울까지 다다른것 같다. 

 
제 2장 나는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1933년 5월 16일
신문 보도에 의하면, 베를린 대광장에서 외국 서적들이 일거에 소각됐다고 한다.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재산도 몰수당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일이다...
히틀러 일당 역시 서적을 모두 불태운다 해도, 유대인이나 독일인의 마음 속에서 반독 사상을 뿌리 뽑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의 본성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1933년 6월 28일
동생 치창의 말로는 캘리포니아에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고 한다...그런데 캘리포니아에서 조선인과 별반 차이 없이 굴욕을 당하고 있는 일본인이 조선에서는 조선인을 그와 똑같이 차별하고 있다. 백인이건 황인이건 흑인이건 홍인이건 인간은 모두 죄인일 뿐이다.

1933년 11월 8일
인간의 본성이 평화보다 전쟁을 더 선호하는 한, 이 세상에 영구히 평화가 올 것 같지는 않다...인간이라는 짐승이 동물의 왕국에서 가장 야비한 동물로 남아있는 한, 이 세상에 평화가 정착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면 종교는 뭘 하고 있나? 자, 인간에게 종교를 줘바라.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을것이다...
인간에게 과학을 줘바라. 인체에 치명적인 독가스와 폭탄을 발명할 것이다. 인간에게 사회주의를 줘바라. 지상 천지를 볼셰비키의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193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서울 여성층에게 또 하나의 석가탄신일이 됐다. 여성들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건 크리스마스가 쇼핑을 위한 또 하나의 핑곗거리이자 기회라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가 이미 저시절부터 이렇게 인식된다는게 재미있다. 

1935년 7월 13일
개인이든 민족이든 간에 힘이 약한 사람들은 힘이 정의라는 사실을, 즉 힘이 정의를 만든다는 사실을 개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힘이야말로 국가가 엄청난 값을 치르고 구하는 하나의 상품이다...하나의 지상목표를 달성하려고 6천만 국민이 60년간 한 사람처럼 일사분란하게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왔다는게 정말이지 경이롭기만 하다(일본).

1935년 9월 29일
일본이 조선에 근대적인 발전과 편의를 도입하는 데 놀랄 만한 업적을 쌓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농업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상당히 발전했다...총독부의 시정 이후로는 수십만명의 젊은 남녀가 계층을 막론하고 교육을 받아왔다. 예전에는 나룻배와 오솔길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다리가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다...지난 25년 동안 우리 조선인은 뭘 배웠고 또 뭘 했던가? 우리는 물질적인 면에서든 도덕적인 면에서든 전보다 더 나은 민족이 됐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제 3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전후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는 2차 세계대전에 가담했다. 일제는 전력의 극대화를 위해 전시동원체제를 가동했다. 조선에서는 1936년 내선일체론 정책에 의해 민족 말살의 시동이 걸렸다. 
 
윤치호는 일본의 군국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도,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에 그의 가족과 측근, 그리고 기독교계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그는 동료를 구하고 총독부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색지대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총독부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가 추구했던 내선일체는, 조선인이 말살되는 것이 아닌, 일본이라는 다민족 대국가 안에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진채 일본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물론 그것이 결국엔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제 1장 흥업구락부 사건의 와중에서

1938년 1월 20일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국가 간이나 민족 간의 윤리가 개인간의 도덕수준에 미치질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있으며, 힘이 정의를 만들어내고 있다...인간이란 존재가 살고있는 세상이 이럴진대, 일본,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제국주의적 행위만이 유독 욕먹을 이유는 없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백인종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점이 있다. 앵글로색슨인이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부과했던 백인종의 자만심의 쌍생아, 즉 치외법권과 관세차별을 일본이 영원이 제거해주었으면 좋겠다. 브로드가든의 정문에 걸려있던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플래카드에서 보이듯이, 앵글로색슨인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상하이가 영원히 지옥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 

윤치호가 일본의 민족성을 부러워하고 경외함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바로 백인들에 의한 뿌리깊은 동양인 차별 때문이다. 윤치호는 유학을 했기 때문에 특히 이점이 더 그에게는 직접적인 경험으로 와닿는 점이 있다. 

1938년 3월 10일
간밤에 안창호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그가 저세상으로 간 게 차라리 잘된 일이다. 하지만 친구를 잃은 슬픔이 눈 앞을 가린다. 

 이 부분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안창호가 45년까지 살아있었어도 친일파가 안되었을까?

1938년 3월 13일
신문보도에 따르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될거라고 한다...
사실 국제연맹은 열강의 이해를 위해 현상 유지를 꾀하려고 했을 뿐 진정한 평화는 안중에도 없었다. 앵글로색슨인의 우수한 자질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만, 그들이 극심한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그들은 이 질환 탓에 매우 부주의해졌다. 

1938년 4월 19일
도쿄를 이리저리 숨 가쁘게 여행하면서 받은 인상은 이렇다. 일본이 국내외에서 한 일을 보면 볼수록 난 위대한 일본인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다. 그들은 조국을 아름답고 부유하게 만든 후, 자기들의 정력과 능률을 조선에 쏟았다. 

 
제 2장 내선일체만이 살 길이다

1940년 1월 4일
창씨개명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인 고유의 이름을 고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조선인, 특히 지체 높은 양반층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1940년 1월 7일
사촌동생 치소, 치영, 동생 치왕, 치창과 함꼐 사촌동생 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1940년 5월 18일
낮 2시에 사촌 동생 치소 지에가서 문중 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토라는 일본식 성으로 바꾸기로 결정됐다. 

사실 이 부분이 참 슬펐다. 조선의 한 지식인이 결국 어떻게 되어가는가,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함부러 친일파라고 욕할 수 있는가? 

1940년 7월 31일
김종찬의 말로는 오는 8월 10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다고 말하더란다.

1940년 8월 11일
어제 저녁 조선의 두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호를 발행했다. 

 
제 3장 유색인종의 해방을 위하여

1941년 12월 8일
이른 아침 경성일보 호외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오늘 새벽 일본이 서태평양상에서 영국 및 미국과 교전을 벌였다는 것이었다(진주만 습격). 이제 새 시대의 먼동이 떠올랐다. 진정한 인종간의 전쟁, 즉 황인종대 백인종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이번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에게 100퍼센트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41년 12월 11일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처음으로 상하이에 갔을 때 잘난 체하는 영국인의 조계방향에 있는 수초천 다리 바로 건너편 공원 어귀에 중국어와 영어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글뤼가 적힌 표지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난 설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느낀점

우선 이 책을 다 보고 느낀점은 매우 슬픈 책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이, 그것도 최상급의 명사가 어떻게 친일파가 되어가는가, 왜 이광수, 최남선 등 당대의 지식인들은 친일파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천착 없이는 우리는 일제시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일제의 전체주의 비판과 동시에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도 같이 봐야한다는 뜻이다. 조선은 아무런 죄 없는 순수하고 순결한 민족이었는데 저 폭력적인 일본이 들어와 약탈, 수탈, 학살, 강간하였다!

이런 인식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이 설명되는가? 망한 조선왕조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는가? 그 브릿지에 해당하는 일제시대의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누구나 친일파에 대해 비판하기는 쉽다. 지금도 정치적 언어로써 친일파라는 주술적 단어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쓰이고 있으며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일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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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친일파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꾸준히 일제의 조선 정책을 비판하고 조롱한다.
 
식민지니까 어쩔수 없이 강압적인 모습이 있다선 치더라도, 그는 일본이 진실로 조선을 합병하고 싶다면 조선인을 차별하지 말 것을 주문했으며, 실제로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총독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에게 동등하게 대우해 줄것을 어필한다. 
 
동시에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이룩한 성취에 경외심을 표하고 있으며 일본인의 국민성을 부러워한다. 그에 비에 너무나 초라하고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조선인들을 보며 절망한다. 그리고 이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 조선인의 계몽에 전력을 다하던 윤치호는 결국 일본과 하나가 되는게 낫겠다는, 즉 내선일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니는 친일파가 된다.
 
사실 이 부분은 당대 지식인들, 이광수, 최남선 등이 왜 친일파가 되었는지도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조선인의 실력을 키우고자 했으나, 일본의 눈부신 발전과 더욱 대비되는 모습을 수 십년 간 봐왔다. 그들이 느낀 것은 오직 절망감 뿐이 아니었을까?  

그나마의 해결책을 찾은것이 내선일체란 것은 한일합방을 청원한 일진회, 즉 핍박받고 고통받던 조선 민초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느꼈다.

조선 말의 민초들을 대표했던 일진회, 그들의 혼을 이어받았던 당대의 지식인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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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도 나오지만 안창호는 38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45년까지 살았어도 친일파가 안되었을까? 사실 안창호가 한 말은 윤치호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력양성, 계몽운동. 먼저 죽었기 때문에 누구는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누구는 친일파로 기억되데 대해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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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친일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은 옳다.

그러나 단지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아니, 알아볼 생각도 않으면서 낙인 찍기만 몰두한다면, 윤치호가 궁극적으로 걱정한, 조선인이 계몽되지 않는다면 이런 역사를 반복하게 될거라는 데 적극 호응해주는 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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