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트리나 포올러스
평점 8
개요
미국 작가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로 1972년 출간되었다.
과도한 경쟁에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고 지나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주제라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 책은 두 가지 루트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내용
줄무늬 애벌레는 먹고 자기만 하는 삶에 곧 무의미함을 느끼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그는 다른 애벌레를 만났지만 그들도 먹고 자기만 하는, 줄무늬에게 답을 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때 애벌레들이 줄지어 거대한 기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둥으로 가는 이유를 아무도 몰랐기에 줄무늬는 직접 가보기로 한다.
가까이서 보니 기둥은 수 많은 애벌레로 이루어져 있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애벌레들이 기둥을 채우고 있었다.
기둥에 오르면 새로운 것이 있을거라 생각한 줄무늬는 기둥을 오르기 시작한다. 짓밟히고 밟고 올라서고, 끔찍한 경험을 한 그는 노란 애벌레와 눈이 마주친다. 슬픈 눈을 하고 있던 노란 애벌레, 잠깐 그녀와 대화한 후 줄무늬는 올라가던 길을 계속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노랑이가 있는 것을 보고 줄무늬는 슬퍼하며 노랑이를 밟고 올라선다. 그러자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한 노랑이가 울기 시작했고 사랑의 감정이 싹튼 둘은 의기투합하여 같이 내려가기로 한다.
노랑이와 줄무늬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던 어느날, 줄무늬는 이 삶이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고, 결국 노랑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기둥을 오르기 위해 떠난다.
매일을 줄무늬가 올라간 기둥을 바라보며 슬퍼하던 노랑이는 어느날 나무가지 위에서 고통스러워 보이는 늙은 애벌레를 만난다. 실타래에 쌓여가는 늙은 애벌레를 보며 노랑이는 도와주려고 하지만 늙은 애벌레는 자신이 나비가 되려고 함을 알려준다.
기둥을 오르던 예전 어딘가에서 나비를 들어본 적이 있던 노랑이는 자신도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곧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긴 시간을 인내해야 함을 깨닫고 나비가 되는 과정에 들어간다.
한편 줄무늬는 이미 한번 올라본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간다.
결국 정상에 오른 줄무늬, 그러나 그는 정상에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자신이 오른 기둥 외에 수 많은 기둥이 다른 곳에도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게 허무함에 빠져있던 때, 노란 나비가 날아와 줄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노란 나비에 의문과 두려움을 갖던 줄무늬는, 그녀가 자신을 어딘가로 데리고 가려함을 느끼고 그녀의 인도에 따라 기둥을 내려와 노란 나비가 부화한 번데기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그리곤 줄무늬도 깨닫는다, 자신도 나비가 될 수 있음을.
느낀점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여러 동화를 사주셨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고, 그래서 보관하는 것은 트리나 폴러스의 이 책과 레오 니오니의 동화 밖에 없다.
왜 그럴까? 동화가 아니라 그렇다.
이 책을 처음 접한 초등학생 땐 읽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30분 정도면 다 읽는 분량의 짧은 책이었지만, 상징의 사용이 복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상징을 이런식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동화가 아니다. 최근에 읽은 후 다른 곳의 해설을 찾아봐도 주제가 아이들을 위한 책은 영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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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통설로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되겠다. 정확히 말하면 경쟁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경쟁적 특성은 인간의 본질이므로, 자본주의는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 가능하도록 한 플랫폼일 뿐, 경쟁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둥은 현대 사화의 과열된 경쟁을, 정상에 오르는 것은 성공 끝에 아무것도 없음을, 애벌레는 소시민을, 나비는 과열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이 그림책이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서 느낀건데, 개인의 탄생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림이 재미있게 읽힌다.
예를들어, 줄무늬가 깨달음을 얻고 기둥을 내려올 때 기둥의 애벌레의 모습이 바뀌어 있다. 올라갈 땐 아무 무늬 없고 개성없이 마치 왕꿈틀이 젤리 처럼 생긴 애벌레들이, 내려올 땐 그들도 각각 자기만의 모양과 개성을 갖고 있음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집단을 상징하는 애벌레 기둥에서 벗어나, 각 개인을 마주함을 뜻한다.
나비는 개인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니체가 말한 초인(위버멘쉬)와 동일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장면은 차라투스트라의 하산인데,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소통이 성립하지 않는다. 나비가 애벌레와 대화할 수 없는 장면은 이를 상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초인이란 흔히 상상되는 슈퍼맨 같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참된 개인, 즉 진실이 기반 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개인인데, 이는 우리 모두가 초인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번데기라는 과정을 거쳐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모습은 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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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목과는 다르게 이 책엔 꽃 얘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철저하게 애벌레의 서사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또한 상징하는 바가 있으니,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것이 꽃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꽃을 위해서가 아닐진데,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 왜 꽃들에겐 희망이 될까? 직관적으로 나비가 있어야 꽃들도 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개인의 탄생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생물학적 결론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
앞서 나비는 개인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집단으로부터 탈피해 자유로운 개인으로 이루어진, 즉 모두가 나비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뭐가 좋기에 정당화될 수 있을까? 만약 자연에서의 나비와 꽃의 공존관계가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모두가 개인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질서로서, 옳음으로서 정당화 될수 없을것이다.
즉, 자유로운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서로 의도하지 않있음에도 사회 전체의 공익을 증진시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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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이 자유롭다면 왜 사회 전체에 이로움을 줄까?
자기 이익을 위한 자발성은 선행처럼 보이는 행동을 유도하는데, 예를들어 돈을 벌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가 보장된다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경쟁자들 보다 좋은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란 궁극적으로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되기 때문에 의도치 않더라도 모두가 혜택을 받는 윈-윈 구조가 되는 것이다.
개인이 타인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사회 전체의 효용이 올라간다는 것을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불렀고 헤겔은 '신의 간지'라고 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 자체로 나비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꽃에게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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