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책

[책리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어빈2 2022. 7. 9. 15:10
728x90
반응형

 


저자 김원영
평점 2

 


개요

독서토론 책으로 선정되어 읽은 책이다.

2018년 장애인 변호사인 김원영이 쓴 책으로 주제는 '장애를 정체성으로 인정하자'는 책이다. 예를들어 청각장애인이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주제 자체에서도 모순이 있을 정도의 다소 극단적 주장이 여럿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용

총 9개의 챕터로 되어있다. 다 소개하고 싶은 종류의 책은 아니어서 몇 가지 인상깊었던 점만 적어보려고 한다.

1) 독서토론 발제로도 나온 질문인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는 삶'에 대한 얘기다. 1장에 나온 내용으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타인의 시선을 늘 의식하다보니, 타인과 맞닥드리는 '보여지는 나' 즉 페르소나가 존재하고, 타인과 거짓의 의사소통을 하는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바라보는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얘기는 많이 하지만, 이건 일종의 <1984>에 나오는 이중사고(double thinking)에 가까울 정도의 영역이라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2) 4장에 레즈비언 청각장애인에 대한 재밌는 얘기가 나온다. 레즈비언 청각 장애인들이 청각 장애란 단지 '차이'일 뿐이기에 자신들의 자식도 청각장애를 갖길 원했고, 대대로 청각장애인 집안의 남자의 정자를 받아 실제로 청각장애 아이를 얻었다는 내용이다. 책에선 여러 논란을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다. 물론 재밌다는 말이 당사자를 생각하면 어폐가 있지만 말이다.

3) 5장엔 장애인 아이에 대해 부모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자식을 손해로 상정하고 산부인과 의사를 고소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놀랍고도 충격적이지만, 낙태 문제와도 상당히 연관되어 생각해 볼 수 있다.

4) 7장엔 오줌권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장애인들이 소변 보는것 조차 불편하여 이것을 하나의 '권리'로 상정하고 있음이 나온다. 최근 전국장애인연합회(전장연)의 시위의 구호가 탈시설과 이동권 보장이라는 점을 봤을 때 너무 일상적으로 누리는 권리가 장애인들에게는 하나의 쟁취 대상일 정도로 괴리가 큼을 알 수 있다.

5)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권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 장애인들도 그들의 내면과 삶을 봤을 때 우리가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에 그들도 아름답다는 것을 우리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학교에 아이들이 장애인 아이들과 같이 지내도록 하여 거부감을 줄이던가, 장애인이 출연하는 연극 등을 보여주는 등이다.

 


느낀점

난잡하고 중언부언이 많은 책이다. 난잡함이라 함은 책의 주제와는 별 상관 없어보이는 내용이 많이 쓰여져있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정신병원 입원 절차가 매우 인권침해적이란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한 챕터 내내 설명하고 있는 등이다. 책의 주제랑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언부언이 많은 것은, 개인적으론 저자 스스로가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주장에 허점이 많을 수록 많은 부분에서 핵심적인 개념 인용이 아닌 표피적이고 교과서적인 개념을 다른 학자의 말을 빌려 설명하는 경향이 있은데, 이 책이 그 과에 속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


장애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장애는, 현재 시점에서 해결될 수 없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뜻한다. 감히 '결함'이라 하는 이유는, 장애 그 자체는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예를 들어 청각장애의 경우, 청각 장애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청각장애'라는 단어가 종결되고 역사가 극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그 장애를 앉고 있는 장애인들의 입장에선 그 기술이 언제 발명될지, 특히 장애의 종류에 따라 기술로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재시점'이란 정의가 허무맹랑할 수 있지만, 명사의 정의를 명확하게 해야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애에 대한 직설적인 정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자'는 저자의 주장은 모순을 앉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기술로 극복 가능한 장애라면, 그것을 하나로 정체성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럼 그것을 극복하는 것 자체는 다름을 획일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청각장애는 그저 다른 것일 뿐인데 다른 것을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관점이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장애 자체는 다른 정체성이기 때문에 청각, 시각,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의 발명은 무의미함을 넘어 부도덕한 일이 된다. 다른 것일 뿐인데 그것을 괘씸하게도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술이 발명되었을 때 해당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해결하려 들까? 아니면 그것도 자신의 정체성이기에 바꾸려고 하지 않을까? 답은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장애를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우리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책의 저자가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것 처럼 색안경을 끼고 차별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극복'의 이미지가 장애를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하자는 태도랑 상반되지 않는다.

-----


4장에 청각장애인 레즈비언이 청각장애를 다름으로 인식하고 그 자식도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여 키운다. 과연 우리는 여기에 대해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 장애를 정체성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도덕적 판단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오감도 하나의 축복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이에게 고의로 장애를 갖고 태어나게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된다.

만약 청각장애가 극복 가능한 기술이 있었다면, 과연 이 레즈비언이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레즈비언들은 이것을 다름으로 보고 그 기술을 이용하지 않으려고 할까? 태어난 아이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청각 장애를 갖고 태어나야 했을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다름)란, 사람마다 다르지만 상호주관적인 스펙트럼을 갖고 있고 그 스펙트럼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틀림'으로 받아들인다. 청각장애가 아니라면 어떨까? 예를들어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커플이 자신들의 장애가 다름이라 생각하고 자식도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나게 한다면, 우리는 이를 다름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틀림이라고 받아들여야할까?

-----


우리가 쉽게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그것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것이다. 장애의 경우 장애는 직면한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치명적 결과를 낳는데, 장애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돕는 것이, 어떤 장애인에게는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가 없는 장애인과 정신지체 장애인이 자신들이 장애인이라는 카테고리에 있다고 해서 서로가 갖고 있는 인터레스트가 같고 이해할 거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같은 범주에 넣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전장연 시위가 대표적인 예이다.

전장연 시위에서 그들은 탈시설과 이동권을 주장했는데, 탈시설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도 일반인처럼 시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삶을 살자고 하는데 동의할 수 있다. 예를들어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불편해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장애인 대중교통 접근성을 높여야 된다는데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대중교통이 아니라 장애인 시설 자체의 탈시설에 있는데, 시설에 의존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가기가 어려운 중증 장애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탈시설은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이처럼 장애인들 끼리도 의견은 하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


이를 잘 드러내는 세계적인, 어쩌면 슬플 수도 있는 축제가 패럴림픽이라고 생각한다.

패럴림픽은 장애인들도 올림픽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인류애적 행사지만, 패럴림픽은 말 그대로 '스포츠를 할 수 있는 장애인'들의 행사이다. 스포츠를 할 수 없는 수준의 장애인은 오히려 이런 행사에서 소외될 수 있는데, 일반인은 '그래 패럴림픽과 같은 장애인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는것 자체가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발전이야'라는 생각 속에 안주하여 실제 장애인이 각각 다르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패럴림픽에 참여할 수 조차 없는 장애인은 외면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인' 올림픽이라는 범주 안에서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


근데 이런 관점에서 장애인 문제를 봤을 때, 그럼 우리는 어느 수준에서 타협해야 할까?

독서토론에서 재미있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영화관에 장애인석이 4개 밖에, 그것도 굉장히 불편한 자리에 있음을 지적한 회원이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영화관이 장애인석을 조금 더 편한 자리에 숫자를 늘리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장애인석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을 위한 좌석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는 청각장애인은 어떨까? 그들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청각장애를 위한 조치가 필요해진다. 그럼 왜 그것이 청각장애만 국한될까?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비도 추가해야되지 않을까? 그럼 왜 또 시각장애까지인가?

만약 모든 종류의 장애를 위한 설비를 영화관이 구비한다면, 우리는 영화 한편을 볼 때 돈을 얼마나 내야 될까?

-----


장애 문제는 이처럼 복합적이고 개인 바이 개인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누군가는 정부가 잘 하면 된다고 하는데, 정부가 한다는것 조차도 결국 그 일을 하는 것은 사회복지사라는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애인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사회복지사들의 사명감은 숭고하지만, 그들이 평생 그 일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것 처럼 늘 장애인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


다행히 현대 대한민국은 저자의 걱정보다는 나은, 차별이 일상화된 나라는 벗어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가는 사람 100명을 붙잡고 장애인을 차별해도 되냐 묻는다면 우리는 '이 미친놈은 뭐지'라는 눈총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장애인을 위한 변론'은 허수아비 때리기라는 느낌도 들었다.

-----


기억에 남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소개해본다.

어렸을 때 마포구 성산동에 오래 살았었는데, 그때 주말마다 수영장을 자주 간 기억이 난다. 그 수영장은 한국 우진학교라는 학교의 수영장이었는데, 우진학교는 장애인 학교다. 동네 한가운데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왔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아무생각 없는 초딩이었기에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그 학교 앞을 지나가게 되면서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봤다.

"아니 장애인 학교가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았어요?"

"어 그때 별 반대 없었던거 같은데, 수영장을 개방한다 그래서 반대가 없었나?"

혐오시설로 분류되었던 장애인 학교를, 이 동네 주민들은 오히려 유치함으로써 장애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동네라는 이미지로 전환하였다.

한국인들이 도달해야 하는 품위가 여기 있지 않을까? 그 수준에 우리가 도달한다면, 아마 장애인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국가나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그러면서 정작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선행하여 우리 공동체가 그 문제를 직접 부담하겠다는 정도의 품위라면,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집값을 올리는 요소가 될 정도라면, 비로소 우리는 장애인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