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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맑스와 사귀기 - 조현수

어빈2 2022. 1. 1.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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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현수
평점 5

 


개요

이 책은 칼 막스(Karl Heinrich Marx) 입문서다.

칼 막스의 생애와 그의 철학, 그리고 그의 영향력이 현대에 어떻게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한국에선 '공산주의'에 대한 일종의 터부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막시즘이라 불리우는 사상을 체질적으로 못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 물론 나도 '자유주의를 꿈꾸는'이라는 블로그처럼 막시즘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과 실제로 막시즘이 어떤것인지를 아는것은 다른 문제기에, 또한 부정적인 생각도 앎이 선행되야 한다는 생각에, 오래전에 구매했던 이 책을 꺼내게 되었다.

읽기 시작한지는 몇일 되었지만, 2022년 새해 첫날 다 읽고 리뷰를 쓴다는점이, 그 책이 막시즘에 관련된 책이라는게 참 웃기긴 하다.

 


내용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은 막스의 생애, 2장은 막스의 사상, 3장은 막스가 전달하려고 했던 의도에 대한 작가의 생각, 마지막 4장은 성찰의 시간이라는 작가의 생각이다.

이 책 한권만 읽고 막시즘을 섣불리 논하는건 코메디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앞으로 막시즘에 관련된 책을 읽을 계획 구체적으로 없기에 이 책을 토대로 내 생각과 막시즘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해보려고 한다.

1장은 막스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총 3개의 챕터로 되어있는데, 짧은 파트고 각 시대별로 어떤 사건이 있었고(여기서 사건이란 공산주의에 관련된 사건들이다) 막스는 그에 대해 어떤 책을 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있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시즘으로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걸 보니 막스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1장 서두에 막시즘에 대한 좌우 이념적 판단은 최대한 지양하고 막시즘이 현대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겠다고 하면서, 상당히 막스와 공산주의에 애정어린 서술을 보이고 있다.

2장은 막스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총 7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는 핵심 파트라고 하겠다. 나도 이 파트에서는 상당히 줄을 많이 쳐가면서 읽었다. 그러나 상당히 중구난방이고 정리되지 못한 부족한 점이 있기에, 감안하고 봐주시길...

챕터 1은 막스가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나는 헤겔이란 이름만 알지 헤겔 철학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헤겔철학이 헤겔의 철학을 제대로 적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에 나온 헤겔 철학에 대해서만 무비판적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이 책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얘기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정신현상학>은 정신이 그 첫번째 단계인 개인적인 정신에서 '자유롭고 완전하게 자의식적'인 통일을 의미하는 절대정신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정신의 첫번째 발전단계인 개인적 정신은 의식은 있으나 자의식과 자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정신이 그자체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상황이라 부른다.

정신은 소외된 단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신은 그 자신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p 49-50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위해 '필연적인 길'을 걷는데, 이를 정신의 변증법적 전개라 부르며, '세계사는 곧 자유를 향한 의식의 진보'라 불린다 한다.

즉, 개별 개체로서의 개인의 정신이 우주의 주인으로서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으며, 정신은 궁극적으로 '절대정신'에서 완성되며, 이 지점에서 인간은 자기의식과 자유를 이룩하고 역사는 그 종착역에 도착한다고 한다.

이를 관념주의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챕터 2는 막스에게 영향을 미친 또 한명의 사람 포이어바흐를 소개하고 있다.

포이어바흐는 급진적 헤겔주의자로 헤겔의 관념주의를 유물주의로 전환시킨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에 헤겔의 '소외' 개념을 이식하는데 성공한다.

골자는 이렇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는데, 신에게 인간이 갖고 있는 지혜, 사랑, 자선 등을 이전시킴으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객체에 의해 인간이 '소외'된다는 것이다. 신의 개념이 풍부해질수록 인간은 더 피폐해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막스는 하늘의 철학, 즉 관념의 철학을 현실 세계의 철학으로 가져오려는 노력을 한다. 즉 '소외'의 문제를 관념과 신의 문제에서 현실로 가져오려고 한 것이다.

막스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자유를 위해 달성해야 하는 것은 평등이라 생각했고,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종교도 철학도 아닌 '화폐'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화폐의 세계는 곧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며, 이 현장을 천착함으로써 막스는 자신의 문제의식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p 74

 


챕터 3은 막스가 어떻게 프로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발견했는지를 쓰고 있다.

막스는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있기에 그 어떤 특수한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사회적 집단, 즉 프로레타리아가 앉고 있는 빈곤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여겼다.

막스는 인간의 본질을 '실천'으로 봤는데, 비판의 무기였던 철학을 실천적 철학의 담지자인 프로레타리아와 조우해야 비로소 실제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 철학자들은 철학적 무기를 제공해주고 프로레타리아가 그 무기를 들고 이를 '실천'에 옮긺으로서 '인간이 소외되어 있는' 이 현상을 끝내고 진정한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챕터 4는 막스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상인은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대상인 다른 상인들뿐 아니라 비싸게 팔아야 하는 대상인 소비자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때 국가가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의 반목을 조성한다면 그 국가는 매우 신중하지 못한 국가다.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우호적일수록 거래는 더욱 유리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을 상거래의 인간적 측면이라고 한다. 또 이와 같은 비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도덕성을 위선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두고 자유무역제도의 자부심이라고 한다.

당신들은 당사자 사이의 형제애를 초래했다고 말하지만 그 형제애는 사실상 도둑들의 형제애다. 당신들이 보편적인 이해관계와 개인적 이해관계의 대립이 무익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순수하게 인간적인 입장에서 무엇을 한적이 있던가? 언제 당신들이 이득을 챙기겠다는 의도 없이, 혹은 당신들 마음 저편에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동기를 지니지 않은 채 도덕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p 87 프리드리히 엥겔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흡사 마이클 샌델의 논리와 동일하다. 이래서 마이클 샌델이 좌익 소리를 듣는거겠지만...

즉 엥겔스와 막스의 논리는 이렇다.

자본주의는 탐욕과 이기적인 충동을 토대로 건설된,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제도라는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협상이 마치 자유로운 계약인것 처럼 떠들지만, 자본가와 노동자의 협상력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유로워 보이기만 한 자유의 부재라고 한다.

게다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계가 도입되면 노동자의 협상력은 더욱 떨어지는데, 자본주의는 이 상황을 가속화하여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에 대한 구조적 착취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타인의 불행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존재로 만들고, 이들을 취하기 위해선 서로 경쟁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관점에서 시장은 계획되지 않은 무질서와 혼돈 그 자체고, 이 안에서 중간계급이 결국 사라지고 백만장자와 빈곤층이라는 극단적인 양극화가 도래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자본주의 이해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의 노동은 잉여가치라는 개념 때문에 자본가의 자본을 증식시키고 그 자본이 다시 재투자 되면서, 즉 그 일부분이 노동자의 임금으로 주어지면서, 노동자의 축적된 노동(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인간소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되어있는 사물화된 노동인 바, 이는 곧 노동의 대상화를 의미한다. 노동의 현재화는 노동의 대상화다. 국민경제학적 상황에서 노동의 이러한 현재화는 노동자의 탈현재화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전유는 소외로, 곧 외화로 나타난다.

p 96 칼 막스 <경제-철학 수고>


또한 막스는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필연적이긴 하지만, 일시적인 발전국면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막스의 인간소외를 도덕철학적 접근으로 보면 이렇다.

막스가 볼 때 인간 역사의 출발점은 어떤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즉 일차적인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욕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로 도덕철학, 인간의 본질은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만족은 새로운 욕구를 일으킨다.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자연과의 투쟁이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을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그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인간이 하는 것이 '노동'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동을 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인간화하는 생산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자유로운 생산활동인 노동은 인간 생활의 본질을 구성하며, 노동이 창출한 물질적 대상은 인간 삶의 구체화를 뜻한다.

그러나

특정한 경제체제에서 노동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데,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대상에 대해 그 어떤 통제력도 가질 수 없게 되며, 오히려 그 대상과 적대적인 관계로 대면하게 된다. 즉, 인간의 본질적인 행위인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즉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소외되는 것을 초래한다. 생산활동은 타인의 지배, 강제로 이루어지는 자유를 상실한 활동이 되며, 사랑과 신뢰를 대신하여 매매와 거래가 들어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금, 소외된 노동, 경쟁, 분업,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챕터 5는 소외와 역사적 유물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인간소외는 프로레타리아 뿐 아니라 브루주아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프로레타리아는 불행을, 브루주아는 행복을 느끼면서 소외되어있다는 차이가 있으며, 이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막스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과 동일하다고 봤다. 실천이란 '실천적인 존재'를 의미하며, 인간의 존재는 의식과 대조되는 것으로 '실천'을 의미한다. 인간의 실천적 의지와 이론과 결합할 때 비로소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레타리아와 브루주아 사이의 계급대립은 프로레타리아의 실천, 즉 혁명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세계를 단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이제 관건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p 113 칼 막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막스가 바라본 역사의 목적은 분명하다. 인간 소외를 끝장내고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로 해방시키는것!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사회적 관계망 내지는 의사소통망을 형성한다고 봤는데, 이 사회적 관계망은 다름아닌 소외의 망이고 이 소외의 망에 대한 설명이 역사적 유물주의라고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막스는 이제 정치경제학(이 시대의 정치경제학은 고전경제학을 뜻함)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이라는 말을 붙인다.

 


챕터 6에서 막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인 생활과정 일반을 결정한다.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p 121 칼 막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막스는 사회를 두 개의 요소인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하부구조를 담당하고 있는 경제가 상부구조인 정치, 법률, 문화,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막스가 경제에 대한 분석에 집중한 것도, 경제에 대한 이해 없이 상부구조를 다룬다면, 이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스는 역사의 발전을 결국 인간 해방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봤고, 하부구조인 경제, 즉 생산력의 발전과 이 발전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인간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정한 상태라고 봤고, 자본주의를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동시에 브루주아와 프로레타리아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때, 프로레타리아의 실천에 의해 공산주의라는 자본주의보다 생산력이 더 발전된 형태의 사회질서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챕터 7에선 정치경제학 비판을 이어가면서 막스의 가장 유명한 저작 <자본>을 다루고 있다.

막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죽은자(죽은 노동, 자본)가 산 자(살아있는 노동, 노동자)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양식에 토대를 두고있다고 한다.

자본가는 자본이 인격화된 것이다. 그의 영혼은 곧 자본의 영혼이다. 그러나 자본은 오로지 하나의 생리적 욕구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가치를 증식하고, 잉여가치를 창조해내며, 최대한 많은 양의 잉여노동을 빨아들인다.

p 140 칼 막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막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단지 사용가치만을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를 위해 생산되며, 이는 곧 자본의 증식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준다 한다. 그럼 왜 교환가치를 위해 생산할까? 상품은 종교적 특성을 지니기에 사람들은 상품에 대해 물신숭배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에 지배당함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교환하기 위해 물건을 생산한다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교환'이란 부의 축적을 위한 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의식적으로 인간의 생산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생산을 할 경우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연합한 인간이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는 사용가치일 뿐이며,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막스는 고전경제학자들의 관점을 거부한다. 막스는 자본주의가 영원하다는 그들의 관점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착취당하는 자본주의는 특정한 발전국면에 등장하는 역사적 제도일 뿐이며, 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사회단계로의 발전, 즉 인간 해방이 실현되는 사회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실천'이다. 공산사회로는 절대로 자동적으로 이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계급적' 실천이다.

 


챕터 8은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와 공산주의라는 제목을 통해 총정리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는데, 그 근저에는 그들이 그렇게나 정언명령처럼 여기는 '사유재산'이 있고, 막스는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착취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결국 막스는 인간의 살아있는 노동과 사랑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원천인 사회를 그리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공산국가를 세우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산사회는,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인간과 인간사이의 모든 갈등이 해결된 사회다.

막스는 자본주의가 역사 발전단계의 특정 현상인것 처럼, 인간의 본성 또한 그렇다고 믿었다. 즉, 인간의 탐욕, 이기심, 질투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가 낳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공동소유와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수단에 의해 대체되는 사회에선 그러한 본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서는 도덕도 새롭게 재정립된다.

새로운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전제'가 되는 도덕성을 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자본이기 때문에 개인의 개별적인 이해관계 추구와는 대립된다. 그러나 공산사회가 오면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각자가 자신이 지닌 능력에 따라 일하고 자신의 욕구에 따라 분배한다!

 


3장은 총체적 평가를 통해 막스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한게 무엇인지 정리하고 있다. 사실상 2장을 정리하여 현대사회의 현실에 접목시킨 것인데, 분량이 짧고 작가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방어적인 서술이 많은 파트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공산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왜 막스가 주장했던것 처럼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곳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웬 농촌사회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까? 작가는 노동자의 실천 부족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럼 왜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영국의 노동자는 실천을 하지 않았을까에 대해선 대답하고 있지않다.

 


4장은 성찰의 시간이란 제목으로 또 작가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이 장의 유일한 내용은 세계화에 대한 비판이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신자유주의는 양극화를 극대화했고, 노동자의 현실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느낀점

막스는 기본적으로 터널비전과 정태적 시각을 갖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어떤 사회를 가져올지, 즉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어떤 세상을 가져올지에 대한 동태적 비전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막스나 루소나 재밌는게,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자신들의 논리를 펼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나이브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인간을 통제하고 규제하고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숨기지 않으며, 그들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보면, 인간을 한낱 찰흙으로 빗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막스의 경우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노동자 개인이 아닌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을 깨닫고 투쟁해야함을 주장하는데, 이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다. 노동자 개인이 노동계급의 생각과 다르면 어떻게 될까? 이는 '적폐'라고 불리며 청산 대상이 된다.

또한 막스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전제가 되는 사회를 꿈꿨는데,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전제가 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는, 즉 공동체의 가치를 위하지 않는 개인의 자유성은 제한되는 세계를 제시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하는 모순을 그대로 껴앉고있다.

그리곤 공산사회는 마치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일치할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을 말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인간 자체에 대한 통찰 부족과 교만인가. 이는 인간의 자유를 떠들면서 정작 인간에 대해서는 부품처럼 생각하는, 자신들의 시각에 의해 교정가능한 수동적인 존재로만 바라보는 그들의 용어로 인간소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데, 진짜 작은 소모임에서 조차 모든 인간들의 의견이 디테일한 측면에선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막스의 예측이 틀린 부분에 대해 적극 옹호하고 있지만, 대부분 막스와 비슷한 비전의 단견으로 보인다.

예를들어 왜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발생했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미에선 공산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막스가 주장했던 '실천'이 부족했음을 이유로 든다.

근데 진짜 이유는 실천의 부족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이념 자체가 농촌사회의 구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나'가 정의되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나'라는 존재가 누구집 아들, 누구집 딸로만 정의되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공산주의의 논리도 이와 동일하다.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개인의 자유성이 제한된다'는게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봤을 때 막스가 가지고 있는 단견은 어느정도 정합성과 논리성을 갖고 있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아동노동, 열악한 노동자의 상황등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바로 아프리카의 아동노동이다.

예를 들자면, 나이키의 축구공 공장이 있다. 나이키가 축구공을 만들 때 아프리카에 공장을 만들고 지역의 아동들의 노동력으로 축구공을 만든다고 비판을 받은적이 있다. 그래서 나이키는 아프리카에서 철수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그 지역의 아동들은 또 다시 매춘, 범죄 등에 내몰리고 있다.

자본주의는 처음 도입될 때는 어느정도 성장하기 전까지 악독해보이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 단계를 겪고 넘어선다면, 비로소 인간처럼 사는 세상이 도래하게 된다.

다행히 이미 세계는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 익숙하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상황은 한 세대를 넘지 않아서(물론 이는 아프리카의 정치적 안정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어느정도 수준의 자본주의적 발달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익숙하지 않았던 역사적 자본주의 초창기엔 정말로 아동 노동이 심각했고 이는 마치 영속될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그럴까?

인간은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힘들때는 인간은 어떻게든 먹고살기 급급하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정도 해소되면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어떤지, 내 아이들이 교육이라든지...

만약 막스가 분석한 자본주의가 맞다면, 지금 왜 우리는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것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는 그럼 영속 가능할까?

내가 보기엔 그렇다. 왜냐하면 막스가 착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펼치되, 그것이 가능한한 정의로움에 들어맞도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설계라는 말 보다는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막스는 인간의 본성과 자본주의의 본성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의 여러 속성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자본주의가 없던 시절에도, 즉 영주vs농노 시절에도 존재하던 문제들이다. 즉 인간의 본성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신의 본성대로 행하더라도, 그것이 정의에 맞도록 되어있는데, 즉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는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 부여된다는 논리다.

자본주의는 내가 노력한 여하에 따라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의 크기가 바뀐다. 그리고 국가는 내가 노력한 것과 내가 가져가는 것의 크기가 다를 경우 '법치'의 이름으로 이에 개입한다.


그럼 막스의 논리는 현대사회에서 무용지물일까?

막스의 논리는 무용지물이 아니다. 다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선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익 대신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종의 유인원이 나올 수 있다. 아니면, 지구를 쳐다보고 있는 어떤 외계 종족은 바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유인원이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한계에서 막스의 이론은 불가하다. 그의 이론이 역사에서 피바람을 부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본성이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자신의 구성주의적 사고에 끼워맞춰 본성을 바꾸려고 하니, 게다가 자신이 제시한 미래가 바로 역사 발전 법칙이라는 '진실'이기에, 그 길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청산대상이 된다. 친절히 진실로 다다르는 길을 알려주는데 이를 거부하는 자는 얼마나 발칙한가!

막스의 도덕철학, 정치철학, 미학의 삼위일체는 이렇다.

인간의 본질은 '실천'하는 존재다(도덕철학).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의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는 그 내부적인 모순 즉,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노동자의 실천이 필요한데,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갖고 계급적 실천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에 종사하여야 한다(정치철학).

혁명의 결과로 올 공산사회야 말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아름다운 사회이기 때문에 공산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을 찬양하고 공산사회로 우리를 인도하는 문학, 음악, 체육, 영화 등 만이 아름다운 것이다(미학).

참 재밌는 것은, 많은 좌익들이 주장하듯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들은 진정한 의미의 막스가 꿈꿨던 공산사회가 아니라 타락한 것이라고 한다.

근데 아니다. 막스가 주장한 대로 하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들처럼 정치구조가 형성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막스가 봤던 그런 공동체의 의지에 복속하는 부품과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뜻이냐면, 인간의 생각은 다양하고 그들의 일반의지로서 하나의 뜻만을 가진 공동체의 형성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 우리 공동체의 결정은 '서기장' 한 사람이 결정하도록 만장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스탈린이고, 모택동이고, 카스트로다.

막스나 루소나 둘 다 추구하는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참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파괴적이기도 한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계급의식의 통합으로서의 분노와 증오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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