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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펌] 시뮬라크르란?

어빈2 2021. 10. 7.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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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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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에 대한 이보다 더 쉬운 설명은 없다.

 

- 한 이과(理科) 전공자로부터 시뮬라크르 관련 질문을 받고,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간략한 설명을 해봅니다.

 

우선 시뮬라크르(simulacre)는 simulate와 같은 어원이다. simulate는 ‘흉내 내다’, ‘짐짓 ... 하는 체 하다’, ‘의태(擬態)하다’(=mimic), ‘모의(模擬) 실험을 하다’의 뜻이다. 군대에서 전투 시뮬레이션이라든가, 고3 학생들의 모의고사 같은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실제는 아니면서 실제와 비슷한 가짜다.

 

‘가짜’라는 의미의 시뮬라크는 한 마디로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이미지 자체가 시뮬라크르다. 그럼 이미지가 무엇인가?

 

이미지(image)라는 말만 들어도 원가 어려워, 인문학 울렁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무수한 시인들이 무수하게 이미지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학문이 서양 학문이며, 모든 것을 서양 언어를 통해 배워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언어적 혼란이다. 개념의 혼란을 느낄 때 서양 언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분명하게 이해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무슨 시(詩)니 상징이니 하고 어려운 문학 용어인 것 같지만, 이미지는 그냥 ‘그림’이다. 한자로는 상(像)이다. 책 속에 들어 있는 삽화, 화보, 그림 등을 영어(또는 불어)로는 그냥 이미지라고 한다. 여기 의자에 앉아 있는 ‘나’라는 사람은 하나의 실체이지만 ‘나’를 찍은 사진은 나의 이미지이다. ‘나’와 똑같지만 ‘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나를 그린 그림이 있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 더 확장하여 ‘나’를 누군가가 묘사해 놓은 글이 있다고 하자. 나를 그대로 묘사했지만 ‘나’ 자체는 아니다. 그것 역시 나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원본과 아주 비슷하지만 결코 원본과 같지 않은 가짜다. 실재와 비슷하지만 실재가 아닌 허상일 뿐이다. 이것이 시뮬라크르다.

 

이미지를 좀 더 얘기해 보자. 이제 연필을 막 쥐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종이에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그림도 이미지고, 유명화가가 캔버스에 그려 놓은 그림도 이미지다. 그런데 이런 그림은 실제의 종이 위에 실제의 연필로 실제의 선을 그려 형태를 만들어 낸 실제의 그림일 수도 있지만, 아직 실제의 종이 위에 실제로 그림을 그려 넣기 전의 그림일 수도 있다.

 

즉 머릿속에 그려 놓는 그림이다. 이게 바로 상상(想像)이다. 영어로는 imagination이다. imagination이란 이미지(image)를 만든다,라는 뜻이다. 상상이란 상(像)을 생각(想) 속에 그려 놓는 것이다.

 

상상이라고 하면 현실 속에 없는 완전히 환상적인 어떤 것이라고 흔히 알고 있지만, 그것까지도 포함하여,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체의 이미지가 상상이다. 현실에 없는 외계인을 상상하는 것도 상상이지만, 조금 있다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 이야기하고 있을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상상이다. 그러므로 상상과 현실은 전혀 반대의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동질적인 것이다.

 

다만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현실이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을 머릿속에서만 그려 보는 것이 상상이다. 또는 실현되었더라도 이미 지나가 과거 속에 들어간 것은 지금 현재의 실재가 아니므로 이것 또한 상상의 영역이다. 내가 가만히 앉아 몇 년전 이 카페에서 만났던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이것이 바로 상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에 실현된 실체성만이 현실이고, 똑같이 실체이더라도 과거에 실현되었다가 지금은 더 이상 없거나, 혹은 미래에 실현될, 그러나 아직은 없는 실체성이 모두 상상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 이게 바로 시뮬라크르다. 다시 말해 모든 이미지, 그것이 시뮬라크르다.

 

컴퓨터 시대에 들어와 가장 많이 얘기되는 가상현실(假想現實, 영어: virtual reality, VR)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가상현실은 컴퓨터라는 인공적인 기술로 만들어낸, 실제와 유사하지만 실제가 아닌,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는 오래 동안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라는 저서에서 이미지의 두 종류에 대해 말했다. 첫 번째는 원본을 정확하게 모사하여 실제 사물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관람자에게 모사품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원본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동상을 그 예로 들었다. 거대한 동상을 제작하던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사람들이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인체의 비율이 현실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상체는 크고, 하체는 작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원본인 인간의 육체를 변형시킨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알베르티가 원근법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이후 사람들은 이것을 원근법이라고 불렀지만 플라톤은 아직 이런 의도적 왜곡을 미학적 방법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로지, 진실을 가장하여 본래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소피스트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삼았을 뿐이다.

 

『소피스트』에 앞서『국가』에서 이미 플라톤은 현대 이미지론의 원형이라 할 만한 이데아 사상을 피력하였다. 여기서 또 한 번 우리는 ‘가상’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는 데, 이때의 가상은 假想이 아니라 假象이다. 假想이 영어로 imagination 또는 virtual reality라면 假象은 영어로 phenomenon 또는 appearance이다. ‘현상(現象)’ 또는 ‘외관’(外觀)이다. 한자(漢字)의 상(象)에는 코끼리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사물’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가상(假象)은 가짜 물건들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지칭하는 데에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 즉 겉모습(외관)을 갖추고 있는 이 현실 세계가 실은 진짜 세계가 아니고 먼 이데아의 세계를 그대로 비추고 있는 가짜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는 침대를 예로 들었다.

 

‘침대’라는 이데아는 유일무이한 것, 즉 유일하게 하나인 것이고, 영원불변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무수하게 많은 침대 장인들이 무수하게 많은 침대를 제작했다.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재질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장인마다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들은 침대 이데아에 최대한 맞게 제작하려고 노력하면서 침대를 만든다.

 

이데아는 ‘하나’지만 현상은 무수하게 많은 ‘다수’다. 이데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불변성이지만 우리 현실 속의 침대는 사용하면 낡아지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망가져 사용 할 수 없게 된다. 이데아는 무한하고 영원성이지만 현상은 유한하고 한시적이다. 이데아를 원본(original)이라고 한다면 무수한 현상들은 그 원본의 사본(copy)이다.

 

침대장이들은 원본에 최대한 비슷하게 침대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기술이나 여건의 차이로 당연히 거기에는 서로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원본에 최대한 가까운 것이 더 우수한 사본이고, 원본에서 거리가 멀수록 등급이 낮은 조악한 사본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해 플라톤주의가 비판 받는 것이 바로 이 부분에서이다. 어느 하나의 중심을 설정하여 그것을 원본으로 삼고, 그것을 최대한 가깝게 모사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논리는 사상의 절대성이나 획일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를 무너뜨려야 서양 철학이 산다”라고 말했다.

 

여하튼, 플라톤은 이에 더 하여 모사(模寫)의 모사(copy of copy)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침대’라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한 이데아가 있는데, 인간 세계에서 그것을 모사하여 집집마다 들여 놓은 것이 우리가 침대라 부르는 현상(모사품)이다. 이 모사품도 원본을 모방했을 뿐, 원본은 아니어서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인데, 이보다 더 가치가 없는 것이 있으니, 종이 위에 그려놓은 침대 그림이다. 즉 이미지이다. 이건 겉모습이 침대와 똑 같거나 비슷하다 해도 원본인 침대의 이데아에서 3단계 내려와 있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모사물일 뿐이다. 침대 이데아라는 원본의 사본이랄 수도 없고, 그저 헛된 모사품이다. 즉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이 미술과 시를 철학자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시뮬라크르’라는 단어 자체는 말하지 않았지만 니체도 『우상들의 황혼』(Twilight of the Idols)이라는 책에서 현실을 왜곡되게 모사하는 철학자들을 질타하며, 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들뢰즈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니체의 ‘영원 회귀’(eternal return) 개념을 시뮬라크르와 동질의 개념으로 보면서 시뮬라크르 찬양에 니체를 소환하였다. 조금씩 달라지며 영원히 반복되는 사물의 영원회귀는, 우리가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판화에서 볼 수 있듯이 조그만 차이로 한없이 반복되는 시뮬라크르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한 발 더 나아가 시뮬라크르는 아예 원본과 상관없이,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힘을 갖는 하이퍼 리얼이 되었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푸코가 시뮬라크르의 밝은 측면과 경쾌한 삶의 환희를 말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의 어두운 측면과 디지털 시대의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마디로 쉽게 요약하자면, 모든 이미지가 바로 시뮬라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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