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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펌]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어빈2 2021. 10. 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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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장부승 간사이 외국어대 교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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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과거사 청산 문제는 한 번 꼭 다루어 보고자 했던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시각과 국내에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을 거론하는 시각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전후 대독협력자 청산의 역사를 별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얘기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합니다.

 

특히 청산 작업을 주도했던 레지스탕스 세력들은 1950년대 이후 사실상 상당수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일이니 더 거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청산이라는 이름하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만명이 즉결 처분됐고, 2만명의 여성이 삭발식을 당했습니다.

 

당시에는 해방의 환희와 격정 속에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만 지나놓고 보니 자기 부모, 아내, 아들, 딸 앞에서 자기가 동족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을 내놓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주 4.3에 대한 서사를 들어보면 좌파 우파 모두 희생자의 서사만 있지요. 가해자는 그냥 군경이라고만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수집한 증언만 보아도 민간인들끼리도 서로 무수히 죽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누구도 공개 장소에 나와서내가 이승만 정권 부역자들을 처단했다혹은빨갱이들을 이렇게 처단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청산이 없었는데 프랑스는청산이 있었고 더욱이 매우 잘했다고 믿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처절한 부역자 청산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선반도 전역에 걸쳐 해도 해도 너무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청산이 밤낮을 바꿔 가면서 몇 년동안 계속됐습니다. 이 잔인한청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프랑스의 전후 대독협력자 청산은 우리에 비해 환경이 훨씬 좋았습니다.

 

통일 정부가 있었고, 이 정부가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으며, 더욱이 비교적 강력한 군대 조직이 이미 프랑스 전역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분열했고,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우리의 군대는 미약했습니다.

 

누구 탓을 하자 라든가 우리가 못났었다 라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이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건이 좋았던 프랑스마저도 실제 청산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무질서와 증오를 경계하고 질서와 관용, 통합을 강조했습니다.

 

드골은야만적 청산단계를 조속 종결하고 재판을 통한 법률적 청산을 개시하고자 했습니다.

 

소급입법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전에 이미 있던 반역죄 조항들을 그대로 갖다 썼습니다. 청산의 개념이나대독일협력의 개념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판사들도 전쟁 전에 판사 생활을 이미 하던 법률 전문가들을 그대로 등용했고, 형사소송법상의 피고인 권리 보호를 부역혐의자들에게도 그대로 다 인정해 줬습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비밀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협력했다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게 해줬습니다.

 

요즘 조선일보 계초 방응모나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가 친일파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만해 한용운의 생활비를 댔었고, 도산 안창호가 투옥되었을 때 그를 위해 탄원서를 썼던 계초 방응모가 만약 프랑스의 청산 법정에 피고로 섰었다면 그에게는 어떤 판결이 났을까요.

 

인촌 김성수와 몽양 여운형 모두 일제 말기에 지금으로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친일적인 행위와 말을 했습니다. 기록이 다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일제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다른 한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거나 독립을 도모하는 활동도 했습니다.

 

인촌과 몽양이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법정에 섰었다면 무슨 판결을 받았을까요?

 

기실, 계초든, 인촌이든 몽양이든 누구도 1949년 당시 독립운동가 출신 김상덕 의원이 주도하던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는 커녕 조사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대독일 부역의 역사를 청산하려 하면서도청산의 범위에 대한 국민적 논란을 최소화하고, 후대에 누가 봐도 이건 정말 처벌을 했어야 했다는 범위로만청산을 국한하고자 했던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처벌을 받은 사람들도 거의 모두가 몇 년 내로 다 사면됐습니다.

 

당시 드골은 그것이 전후 프랑스의 재건과 통합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악질적, 핵심적 부역자들을 분명히 처단할 수 있었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비하면 청산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렇게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청산 과정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즉결 처분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나중에 진지하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부역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거나 혹은 사형을 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었는데, 즉결처분한 것은 지나친 행위였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은 피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당시 즉결 처분 과정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아니면 침묵했습니다. 전시 즉결처분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해도 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즉결 처분이다소 무리였던 것이라고 하는 설명을 들을 때 그 아들, 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삭발식을 당했던 여성들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났고, 그들은 자기들을 삭발시키고 옷을 벗기고 린치를 가했던 사람들과 다시 한 마을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 반목과 어색함은 계속됐습니다.

 

주세페 또르나또레 감독의 영화 말레나를 보면 말레나가 삭발식을 당하고 나서 얼마 후 죽은 줄 알았던 그녀의 남편이 살아 돌아옵니다. 한 팔을 잃은 채로.

 

이탈리아 군복을 입은 남편의 팔짱을 끼고 시장통을 걸어 가는 말레나에게, 바로 얼마 전 그 말레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던 한 시장 상인 아주머니가 존대말을 쓰며 말을 겁니다. 어색하게. 물건을 팔려고 한 것이죠.

 

재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산이나부역의 법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고 토론을 아무리 해도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레지스탕스 출신들간에 제비뽑기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표결로 최종판결을 내리는 형식을 취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판결이 들쭉 날쭉이었습니다. 비슷한 행위를 했는데도 어느 기업인은 무죄가 나오고 다른 기업인은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처벌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자기들이 사실은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다, 애국을 했다고 하면서 항변하는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공무원들 중에도 주로 하급공무원들이 많은 처벌을 받게 되자 부역자 청산 재판에 대한 냉소와 저항이 확산되었고, 일부 구 레지스탕스 요원들은 청산 과정의 불명확성과 불평등성에 대해 환멸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처벌되어야 할 거악이라든가 대기업 소유자,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대부분 법망을 피해 나갔습니다. 레지스탕스들의 좌절과 환멸은 더 깊어 갔고, 전후 많은 레지스탕스 요원들이 청산 과정에 대해 더욱 침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셋째, 흔히들 우리의 일제 청산 과정이 좌절된 이유로 미국의 개입을 듭니다. 혹은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결로 인해 친일파들이 반공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전선이 흐려진 탓을 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당시의 국제정세가 우리 국내적 청산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죠.

 

그런데 이런 부정적 영향은 프랑스에도 있었습니다.

 

해방 정국의 드골 정부는 여전히 물적 기반이 취약했습니다. 드골의 힘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국내의 지지라기보다는 연합국의 승인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재건보다 청산에 집중할 경우, 자칫 연합국의 우려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동유럽 전체가 소련군의 장악하에 있었습니다. 이제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은 명약관화했고, 더욱이 프랑스 공산당은 당시에 소련에 우호적이었습니다.

 

드골 정부로서는 미국과 영국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공산당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청산 과정을 더욱 확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동유럽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고 서유럽 내부적으로도 공산당의 세력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데, 여기서 재건과 통합보다 청산에 집중하다가는 자칫 드골 정부가 붕괴할 수도 있다고 본 겁니다.

 

드골이 질서 잡힌 청산을 강조하고, 법적인 절차를 부르짖고 사면을 통한 통합과 관용을 목놓아 외친 것에는 이러한 고민이 있는 겁니다. 마치 드골 정부는 청산 한 가지에 집중하여 철저한 독일부역자 청산을 강조한 것처럼 알고 계신 분은 역사를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역사는 진공 상태 속에서 전개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상주의적 진전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습니다.

 

아래 제 글에 댓글 다신 분 중에 한 분이한국은 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가 성공해 본 경험이 한번도 없는 나라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가 성공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어느 시기, 어느 나라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프랑스 혁명 직후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대의와 순수성을 외치며 약 17천명을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수 많은 혁명 동지들을 죽였고, 그 자신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에서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가 성공한 것인가요?

 

오히려 그로 인한 무질서 속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국민정부는 붕괴했고 나폴레옹 장군이 독재자로 나중에는 황제가 되어 프랑스를 통치하게 됩니다.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 하에서 전후 청산 작업을 수행했던 프랑스에서도 커다란 후유증이 남았고, 그 후 수 십년동안 프랑스인들에게청산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물론 우리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낳았죠. 조건 자체가 훨씬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자기 아버지가 독일인들에게 빵과 고기를 팔았다는 이유로 즉결처분된 것을 알았을 때, 자기 어머니가 독일군과의 사이에서 자기를 낳은 대가로 저잣거리에서 삭발식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아들과 딸은 그 즉결처분과 그 삭발식을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라고 여길까요?

 

청산이 불필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제 청산 과정이 미약했고 모호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온전히 보고 올바른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프랑스의 경험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는 단결해야 했습니다. 이념 대결 핑계를 대며 단결하지 못한 것을 변명하는 것도 비겁한 짓입니다. 우리가 일본 패전 이전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드골 정부처럼 단일 대오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물론 프랑스는 독일 점령 이전에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였죠.

 

점령기간도 짧았습니다. 또 독일 점령지 이외에 비시 정부 통치 구역에서 레지스탕스의 활동 영역이 훨씬 넓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물리적 힘을 키우지 못한 것은 처절히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군대의 힘은 단순히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우리 스스로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지 못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셋째, 위의 두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해도 청산 과정은 질서와 단결과 통합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좋은 조건을 갖고 있던 드골 정부도 질서잡힌 청산과 단결, 통합, 공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세상 그 어느 정부도청산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정부가 없습니다.

 

전후의 엄혹한 상황은 프랑스나 조선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재건을 위해서는 국민적 단결과 통합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고려는 불가피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조건이 좋았던 드골정부도 연합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우리는 통일정부도 없었고, 군대도 없고, 경제력은 더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우리가 마치 미국이나 당시 국제정세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청산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라든가 혹은 그랬어야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과도한 이상주의에 근거한 탁상공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게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땅에서의 일제 청산이 자기들의 최우선 과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최우선 과제는 소련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일본 패전후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들은 당시 조선의 정세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당시에 남한에서과거 청산을 추진하는 주체 세력은 미국에게 이 청산 과정이 절대 혼란이나 무질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반공의 대오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명확한 시그널을 보내주는 전술적 고려가 필요했습 니다.

 

궁극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마키아벨리가 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진정 일제 청산의 성공을 원했다면 말이죠.

 

물론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전술적 고려는 분명 청산 범위의 축소를 가져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축소와 그에 따르는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반민특위로 시작된 청산 과정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것은 정말 천추의 한입니다.

 

그러나 당시 반민특위의 관점에 서서, 당시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던 부역 청산 과정의 교훈을 감안하여, 1949년의 정세를 돌아본다면 여러 아쉬움이 남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는 정녕 불가능한 것이었나? 반민특위 70주년을 맞이하여 곱씹어 보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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