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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펌] 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어빈2 2021. 10. 3.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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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박유하 세종대 교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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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1. 역사의 사법화

 

한일관계가 빈사상태다. 1965년에 수교를 회복한 이후사상최악이라는 표현을 쓰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열어왔다는 한일경제인 회의가 연기되었고, 지금과 같은 정황이 이어지는 한 6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한일수뇌 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런 현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건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칠한 일본의 태도를 적반하장이라고만 여긴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건 일본의 정치가들이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대통령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틀렸다.

 

대통령도 이제는 한일관계회복을 바라고 있는 듯 한데, 분석이 옳지 않은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6년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책을 통해 현재와 같은 정황이 닥칠 수 있음을 예고한 적이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자신들의 운동과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 이들에 의해 법정에 갇히는 사태를 맞았지만, 그 책은 오로지 오늘과 같은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었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단적으로, 나의 입을 막으려한 이들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다.

 

작년가을에 신일철 징용판결이 나온 이후 한일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자주 삐걱이고 있지만, 그런 양국갈등의 연원에는 위안부문제가 있다. 일본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때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는 것도 모두 위안부문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 쪽에도, 위안부문제를 4반세기 겪으면서사죄하지 않는 일본관이 정착되어 버린 탓에 불신이 가득하다.

 

말하자면, 현재 한일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각각의 문제 이전에, 오랜 갈등의 세월을 겪으면서 쌓여온 불신과 체념 쪽이다. G20이 일본에서 열리는데도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수뇌회담일정을 일본이 잡지 않고 있는 것도 그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른바한일관계전문가들과,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 전문가 혹은 지원자들은 사실 접점이 거의 없다. 전자는 대개국익을 언급하며 앞으로 나아가자는 제언을 하고, 후자는국익보다 개인이라면서피해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그 양쪽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그 점 역시,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이유중 하나다. 대통령이 취임초기와 달리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게 되었음에도 실질적 변화가 없는 건, 실제정책은 후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대통령은 그 양쪽이 합쳐져 분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일간 갈등을 빚고 있는 각각의 문제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한쪽은 정치경제문제를 앞세워 생각하느라 문제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른 한쪽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독점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그 그 독점이 옳은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와 취재로발언의 독점양상의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 보려는 언론도 없다. 론들 대부분은 그저 전자와 함께 탄식하거나, 그저 후자와 똑같은 목소리가 되어운동에 참여한다. 한일간갈등문제가, 수많은 언론의 참여 덕분에 전국민이 아는 문제가 되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늘지 않고 인식은 천편일률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근 들어 전서울대 교수 이영훈 교수가 열정적으로 위안부문제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아마도 진보쪽 사람들은 이교수의 강의를 그저 일본우익과 동일시하며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위안부문제 담론을 관장해 온 이들은 이영훈교수의 강의에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과의 접점을 찾는 일은, 한국 내부의 접점을 찾는 일도 되어야 한다.

 

사실 90년대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했던 김대중 시대를 맞아 2000년대 초반은 수교 이후 최고조로 한일관계는 좋았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때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 진 정부가 문서들을 공개하게 되고,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다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국정부는 다시한번강제동원피해자들에게 법을 만들어 보상했다. 징병/징용자는 물론, 위안부할머니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은 같은 무렵에 이번에는 외교부를 상대로 또다른 소송을 일으킨다. ‘정부가 위안 부문제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소송이다. 5년이 지나고 2011년 여름에 정부-외교부가 패소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이른바수요데모’ 1000회를 맞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들어서게 된다.

 

90년대에 일어났으면서도 국민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위안부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운동의 흐름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이른바평화나비라 불리는 대학생조직의 포스터가 대학마다에 나붙기 시작했고, 서울시

후원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수요집회에 참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교등학생과 초등학생까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패소한 외교부는 자신이 하는 일이위헌이 되지 않도록 위안부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관여방식과 내용 은 맥락상 하나부터 열까지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본격적으로외교문제이자정 치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대상으로 소송까지 걸어 위안부문제를 외교문제로 만들었던 지원자들이, 이제 와서 위안부 문제는정치/외교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치경제 중심의 국가간문제 따위가 아니라, 역사에서 소외되었 던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우선적으로 나서야 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 자체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그 주장은, 위안부문제를 앞장서서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지원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2. 법적사죄소송의 무기화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를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지원자들, 그 중에서도전문가인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이 해야 할 사죄가법적사죄라는 주장을 해 온 것도,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것도 법학 자/법률가들이다.

 

그런데, 한시대의 역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한 사죄가 왜 꼭법적사죄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없었다. 자세히는 따로 쓰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대로강제연행-국가책임이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왜을 기반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이 90년대 이후 여러번에 걸쳐 사죄와 보상을 실시하며 위안부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지원자들의 요구에 대답했음에 도, 그런 사죄는 의미가 없다면서 국회에서배상법을 만들어서 사죄/보상해야 한다는게법적사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국회의원들 중 일부는 90년대에서 2000년대초반까지, 그 배상법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이 아닌데 왜 국가범죄인가?’ 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반발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그 반발을 경청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이후 있었던 건, 자신들의 주장을 돌아보고 일본을 움직이도록 만들 더 날카로운 비판방식모색이나 새로운 접점찾기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바꾼강제연행주장과, ‘죄의식도 책임의식도 없는일본에 대한 비난, 그리고 소송이었다.

 

2015년 말에 있었던한일합의에 지원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실은 그것이 법적사죄가 아니었다는, 그 단하나의 이유에 있다. 나는 그 주장의 문제점을 이미 논한바 있지만, 이 글 후반에서 다시한번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사실, ‘위안부를 매춘부라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역시 나에 대한 고소의 표면적 이유일 뿐, 고발자들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고소한 이유는박유하의 활동이 자신들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소장에 명확히 쓰여 있다. 덧붙여 두자면, 그 터무니 없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를 만든건 로스쿨 학생들이, 그렇게 읽도록 이끈 것도 변호사였다.

 

위안부 지원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고소하고 승소하여 정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앞에 썼지만, 문제해결수단으로 사법부나 국제재판소가 쉽게 이용되는 건 한국만이 아닌 듯 하다. 그런 현상을 두고 어떤 이는정치의 사법화”, “외교의 사법화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 더 심각한 건역사의 사법화현상이다.

 

20세기말에 일어나 21세기로 이어진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학자 이상으로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실제로, 위안부문제 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논리를 만든 것도, 역사학자 이상으로 법률가들이다. 그 선두에 섰던건 도츠 카에츠로라는 일본인 변호사였다. 그는 80년대부터 인권문제를 유엔에 어필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어필하고 싶어했던 정대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일반화된성노예라는 단어 도 그가 만든 단어였다.

 

90년대 이후 정대협 역시 유엔을 향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나(쿠마라스와미도 법학자다) 맥두걸 보고서가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든건 이들 일본인 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변호사협회 자체가, 단체로서, 조직적으로 일찍부터 이 문제와 마주해 왔다.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등피해자문제에 일찍부터 관여해 온 최봉태변호사가, 자신이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일본유학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이 열정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 것에 있다고 한 말은 그런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안부문제가 대두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인 1994년에 국제법률가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놓은 것도, 이들 일본법률가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현시점에서의 시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건 역사가나 증언자 이상으로 법학자/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을 역사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든 건동경재판 혹은뉴른베르크재판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문제가 법정에서처벌된 것을 아는 이들이, 새롭게 맞닥뜨리게 된 과거문제 역시 그와 비슷한 문제로 이해하고, 비슷한 방식으로처벌하려 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위안부문제를전쟁중인 적대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로만 이해하고, ’전쟁범죄로 이해했다. 이들의 보고서는, 동시대에 일어난 아프리카/동유럽의 내전에서의 부족간 강간납치등 여성들의 피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자들이 위안부문제를 그런 문제들과 같은 문제인 것처럼 어필했기 때문이고, 유엔인권위원회 나 국제법률가위원회는 그런 의견을 받아들여 동시대비극과 위안부문제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미 위안부동원은 강제연행이 아니라 공창제를 이용한 간접적 동원이었음이 연구되었고 발표되고 있었다(김부자, 송연옥., 야마시타영애등). 하지만 그런학문내용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유엔에 제출된 흔적은 없다. 물론, 위안소에 조선인 대만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고, 오히려 일본인 여성들이 위안부제도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되지 않았다.

 

기존학자들은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위안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미 청일전쟁때 한반도에는 군인을 위한 일본 여성들이 있었다. 러일 전쟁 직후에 1910년에 만들어진 진해의 일본군기지가위안을 의뢰한 여성들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유곽여성들이었다.

 

일본과 조선은전쟁이 아니라식민지화를 매개로 한 관계였다. 좋든 싫든 조선은 이 시기일본제국치하에 놓였으니 일본과 국가단위로 적이 되어 싸운 중국과는, 만주국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관계가 달랐다. 따라서 조선인 위안부문제는전쟁이 아니라조선의 식민지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제목에 굳이 <제국><식민지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호관계를 정확히 보아야만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판만이 해결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이후, 20년 이상전쟁범죄라는 말만을 사용해 왔던 연구자/활동가들은전쟁책임이라는 단어대신식민 지지배책임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나의 책을 법정으로 보낸 이들에게 동조해 <제국의 위안부>를 계속 비난중이다.

 

90년대이후 한일갈등문제에서관계자들은 분명 선의와 열정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써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충분히 평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활동은 안타깝게도 4반세기가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법률가들에 의해 사법부가 그들 의 손을 들어줬고 그에 따라 정부까지 나섰음에도. 선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위안부문제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대립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갈등을 유지시켰다.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대화

 

그런데 지금, 위안부문제와 똑같은 일이 징용문제에서 벌어지려 하는 중이다.

 

징용자체에 대한 공통인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데도(도노무라 마사루의 <조선인강제연행>, 이우연의 논문등도 참고될 필요가 있음에도), 사법부는 역사학자의 학문성과는 배제하고 법률가들의 주장에만 호응해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위안부문제의 경우, 지원자들은 사법부의 권위를 빌려 행정부를 움직였고, 국민의 세금과(정부지원/지자체지원) 국민의 기부금을 사용해 국민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최봉태변호사는, 작년 10월말에 나온 대법원징용판결의 흐름을 만드는데 기여한 핵심인물이자, 2006년에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문제에서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일으킨 헌법 소원의 주역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판결이후, 그는 여러 언론에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며정부가 양국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주장 중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4반세기의의 관여가, 역사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이 갈등해결의 최종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이자 약속이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로서 작동하고, 그런 의미에서 때로 인권보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의 관여는 그 자체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곧 역사문제갈등의 최종판단주체가 꼭 법률가이거나 법정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사실 한일양국은 그 점을 알고 있었고, 역사문제에서 양국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가동시킨 적도 있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자들조차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를 법정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대의 주장에 대한 경청과 접점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역사 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인선에 있다. 학자들 중에도 상대편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접점을 찾거나 업그레이드된 비판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이들은 적지 않다. )

 

하물며 법정에서도 역사문제를 판단하려면 학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법정은 결국학술적공방이 된다.그렇다면,역사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의 장이 법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역사학자조차도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는 정언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학문이란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의 사태에 관한 인식에서 당사자와 주변인들모두가 완전히일치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그저, 관계자들 최대다수의합의점을 찾는 일일 뿐이다. 실제로 법정에서도합의라는 이름의 접점 찾기가 곧잘 이루어지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법정이란, 어떤 사태를 두고 예스와 노를 명백히 해야 하는 공간이다. 예스인지 노인지에 대답하는 일이란 문제를 한없이 단순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화시키는 이유는, 법정에서는 오로지 기존의을 어겼는지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 다. 법을 위반한범죄로 간주되어야만 처벌가능한의 성격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역시, 그 때문에 위안부동원과 위안소라는 장소가불법여부인지에 주목하면서 기존의을 어겼다고 강조해왔다. 관계자들이 끊임없이강제연행이라고 말해 왔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은 처음엔 위안부동원을 군인에 의한 강제동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이 애매해지자, 이번에는 강제성을 위안소에서의 생활로 옮겨 설명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후에 다시 보겠지만 이미 성립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 말은 위안부문제에서 일본이나 군의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강제성강조가 위안부문제를 국가와 국가간의(민족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본 인위안부가 잊혀진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일본인위안부란 당연히일본군(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에 의구심을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가인권문제라면 당연히일본인위안부문제도 주목받았어야 했음에도, 일본인위안부는 그렇게 해서 같은 4반세기동안 철저히 잊혀졌다. 다름 아닌인권문제를 직접 다루는 이들에 의해서다.

 

일본인 위안부가 주목받지 못한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위안부문제의 사법화에도 있다. 위안부문제가 민족간 문제이기 이전에 남녀문제이자 계급문제라는 인식을 미처 갖지 못했던법지상주의, 많은 이들이 위안부문제를 오로지 <일본군이타국여성을 노예처럼 끌어간 국가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역사의 사법화는 때로 순기능도 한다. 하지만 위안부문제의 경우, 문제자체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정황에서 과거의전쟁범죄로만 인식되면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다른피해자를 배제했다.

 

징용문제 판결을 두고 대통령과 외교부가, 사법부가 하는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이런 과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 자신 변호사로서역사의 사법화에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의 최봉태 변호사에 따르면 문대통령은 2000년에 부산에서 일으킨 최초의 징용자소송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사반세기에 걸친역사의 사법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역사의 사법화는 또다른 모순을 만들면서 동시대뿐 아니라 차세대의 평화마저 위협하게 것이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의 사태에서의 정의를 판단하는 능력은 법관들에게만 있지 않다. 더구나 사법이 때로 거꾸로 폭력이 되어 온 역사는 멀리 가지 않아도 냉전시대의 인혁당사건이 보여 주었다.

 

역사의 사법화의 세월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당사자주의가 중요하다면 더더욱, ‘역사의 사법화의 주역이었던 대리인/대변인들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내 온당사자는 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법공간은, 대립되는 의견의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로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도이란 역사문제 를 관장하는 장으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문제가 정치문제이자 외교문제가 되어 국민모두의 문제가 된 이상, 그 해결은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국민들이 함께 납득 가능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접점을 찾기 위한 모든 과정은 내외부간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의 목표는 동시대는 물론 차세대를 위한 것 이어야 한다.

 

4. 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위안부문제 관계자들은 2000년에 있었던 여성국제전범재판을 통해 히로히토천황을유죄로 단죄했다. 앞서 언급한 박원순 시장은 그 판결을 내리도록 종용한검사중 한사람이었다.

 

아키히토 전 천황을전범의 자식이라고 규정한 문희상의장의 인식이 2000년 여성국제전범재판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역시도법적판단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케이스가 된다.

 

물론, 국제여성전범법정은 위안부문제 발생 이후, 냉전붕괴와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가까워진 세계여성들이 급격히 교류 의 장과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국경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놓은 장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일본인위안부는 이 자리에서도 배제되었고 그런 한 이여성법정은 반쪽짜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법정의 권위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정체시켰다.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한 연합국조차 히로히토 천황을전범으로 판결하지는 않았다. 군부와 천황을 따로 놓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판결이 맞는지 여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직 위안부문제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채로, 또 왜 그 시대가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는 대신상징으로나마 천황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모르는 채로, 50여년 후현대의 법관들이 성급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처벌을 강조하는 이들은 곧잘 매춘을 강요한 군인을 사형시킨 스마랑 사건을 강조하지만, 스마랑 사건 판결은 국가의 수장이나 군대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황이처벌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 국민의 동요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합국은 일본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황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 헌법9조와 맞바꾸어져 말 그대로평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후 44년을 살았다.

 

그런데 과거의 연합국의 판단에 대한 국제여성전범재판의 관심은 오로지처벌여부에만 있었던 듯 하다. 그 판결은 시대 적 진보의 양상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시대를 정체시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판결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일본의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정치가 아니라 문화다. 일본인들에게는 국제 여성 전범재판의 판결이나 문희상 의장의 발언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다만, 문의상의장이 천황의 사죄를 요구한 건 다른 한편으로는 지원자들이 주장해 온법적사죄와는 대치되는 발언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맥락도 읽을 필요가 있다. )

 

더구나 설령 천황이든 상황이든 일본을 상징/대표하는 이의 사죄가 있다고 한들 위안부문제자체와 해결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이 곧바로 한일관계우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엔 오해와 과장과 독주가 만든 상호 불신과 혐오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사회는 그저사죄하지 않던 뻔뻔한 일본이 국제사회 압박에 못이겨 드디어 무릎을 꿇었다고만 여길 것이다.

 

4반세기동안, 법률가에 의해 역사문제가 좌지우지되고, 법정은 개인의 입을 틀어막고 정부를 조종하고 타국을 겁박하 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 할 법의 공간, 책임을 져야 할 주체조차 존경의념을 가져야 할 공간을 그 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복잡다단한 역사를 외교/정치문제화시키고, 단순한 예스 혹은 노로 대답하도록 만든 건 누구인가?

 

재판이 (일본재산의) 가압류판결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과 한국정부가 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 다’(최봉태)는 한 변호사의 주장은 가히 오늘의 사법의 권력화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그 조치가 옳다면 사법이라는 권력사용은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정부가 지원자들과의 논의를 거쳐 일본과 협의한 끝에한일합의를 내놓자, 이번에는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서 반대에 나섰다. 곧바로 수용하겠다는 의견을 낸 위안부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런 분의 목소리는 곧바로 묻혔고 지금까지도 그 정황엔 변함이 없다. 그 분들을 그저 회유당한 것으로만 보는(보게 만든 이들이 물론 있다)시선은, 정작당사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던 이 4반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한다.

 

한일합의에 대해서는 다시 쓰겠지만,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실은 기억되어야 한다. 사법이 역사를 관장하는 주체로 나서 개인과 정부와 타국에 대한 압박의 도구로 쓰여졌으나, 정작당사자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대통령과 국회의장께 제안하고 싶다. 한일관계를 회복시키고 장기적인 화해평화를 지향한다면 대화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동시에 그 논의과정을 언론이 국민들에게 전달해 모든 국민들이 듣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시급히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는 1년 단위로, 긴 시간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5 10년 단위로 대화하면서 학자와 관계자들에게 논의를 맡기고 언론이 보도하도록 하면, 국민들은 그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서 싸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다. 10, 30, 50,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합의된 사항을 각각의 교과서에 반영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한일양국은 역사인식에서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에는 북한도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백년대계란 그런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나온, 징용문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민관합동위원회의 견 해와 그 이후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정부가 해온 일을 제대로 공지할 필요가 있다. 논의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 다. 우리 국민은 아직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야 밝혀진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지원자들과 법정은 자신들만의 이해와 판단만이 옳다고, 그것에 따르라고 무려 4반세기동안 주장해 왔다. 심지어 알게 된 사실을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한일관계다.

 

이 글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사고를 재검증하기 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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