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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공산당선언 - 칼 마르크스 외

어빈2 2022. 1. 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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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칼 막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평점 6

 


개요

이 책은 칼 막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 강령이다. 짧지만 명문이며,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엥겔스에 따르면, 공산당선언의 이론은 전적으로 칼 막스의 작품이며, 자신의 역할은 미미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공산당선언의 문장 수준과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의 원칙>의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보다 쉽고 일반적인 언어로 글을 쓰는 느낌이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칼 막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과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의 원칙, 그리고 옮긴이의 해제로 이루어져있다.

 


내용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다.

1장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장은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라는 제목을 되어있다. 1~2장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장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4장은 여러 반대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라는 이름으로 되어있다.

 


들어가는 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부르주아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형성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대의 노예부터 봉건시대의 귀족과 농노 등 역사 자체는 두 개의 대립하는 계급 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라고 한다.

종래에 들어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이때 이익이란 자신들의 공장을 돌리기 위해 쉽게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봉건 귀족을 타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의제 공화국을 만드는 등 역사적으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배권을 얻은 부르주아는 다만 귀족을 대체한 신분에 불과했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켰고,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자유로 대체하였다.

부르주아지는 가족관계 위에 드리워졌던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찢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관계로 전환시켰다.

오래되고 신성한 관념들과 견해들은 해체되었고 새롭게 형성된 것은 굳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p 19-20

 

이처럼 부르주아지들은 모든 전래의 가치들을 단 하나의 '돈'으로 대체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르주아지라는 신분 자체가 생산관계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품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가 부르주아지를 전 세계로 내몰고 그들은 세계시장을 착취하기 위해 모든 국가의 생산과 소비를 범국가적으로 조직한다. 그들은 '문명'이란 이름으로 미개한 국가들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시장에 편입시켰으며, 다른 나라에도 이 '문명'을 도입하라고 강요한다.

그 결과 부르주아지는 백 년도 안되는 지배 기간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가 함께 이룩한 것보다 더 엄청나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의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냈다.

자본이 발전하는 정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도 발전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생존하며,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 즉 노동의 가격을 지불하고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노동자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노동자 개개인이 투쟁하지만,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한 산업의 노동자들이 투쟁한다. 대규모 산업이 가져다준 교통수단의 확대는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을 서로 연계시킨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단결하게 되고 점차 '두 계급 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띄게 된다. 그리고 충돌은 폭동과 폭력으로 분출된다.

그럼 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주체일까?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것으로 지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노동자는 산업 발전과 함께 빈민이 되고 확대되는 사회적 빈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미래지향적인 엄청난 다수의 이해관계를 위한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인 사회운동이다.

부르주아의 필수 형성 조건인 사유재산은 잉여자본이 증가함으로서 축적되는데, 자본의 필수조건은 임금노동이다. 그리고 임금노동은 오로지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근거한다. 그러나 경쟁을 통해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대신 '계급'적 연합을 통해 그들을 혁명적으로 단결시키게 되고, 이것이 부르주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자기파괴이다.

 


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그럼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프롤레타리아가 각각 전개하는 다양한 국내 투쟁에서 국적과는 무관한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공산주의자이다. 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만들고 부르주아의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정치 권력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럼 공산주의자란 무엇인가?

공산주의를 특정짓는 것은 소유 그자체의 폐지가 아니라 시민적 소유, 즉 사적 소유의 폐지이다. 왜냐하면 사적소유란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품의 제조와 획득의 완성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의 소유란 임금 노동을 착취하고, 새로운 임금노등을 산출하여 다시금 그것을 착취하는 조건 하에서만 증식할 수 있는 소유를 산출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가 사적 소유를 폐지한다는데에 경악하는데, 애초에 10%의 부르주아한테만 존재하고, 나머지 90%의 프롤레타리아한테는 존재하지 않는 소유를, 즉 다수의 무소유를 기반으로 한 소수의 소유를 폐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결국 노동자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지배 계급으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을 첫걸음으로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1. 토지 소유의 몰수와 지대를 국가 경비로 전용
2. 고율의 누진세
3. 상속권 폐지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압류
5. 국가 수중에 운송제도 집중
6. 국영공장 확대, 토지 공동 개간
7. 강제노동
8. 균형발전
9. 무상교육

 

이를 통해 계급 대립이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마저 사라지며, 그 자리에 하나의 연합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설 것이다.

 


3장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이 장에서는 봉건주의적 사회주의, 소시민적 사회주의, 독일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비판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 대해 간략하게 분석하고 공산주의와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4장 여러 반대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공산주의자들은 폴란드, 스위스 등 각 나라의 공산당들의 투쟁 일반을 지지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느낀점

<막스와 사귀기>를 읽고 나서인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는 내용 이해가 어려웠는데, 그래도 머리가 커지긴 했나보다.

<막스와 사귀기>에서 적은 느낀점과 큰 차이는 없다. 정태적이고 폭력적이며 대단히 선동적이다.

마이클 샌델과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델은 돈으로 살 수없는 가치들이 자본주의 때문에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치환되었다고 한다. 공산당선언에도 상업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존엄과 가족의 가치들이 교환가치로 대체되었다는 비판을 한다.

다만 공산당선언이 샌델보다 나은 이유는, 샌델의 경우 극단적 영역에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나열하여 은근히 반자본주의적 심리를 선동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애써 숨기면서 초연한척 하는데, 막스는 대놓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폭력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말하니 말이다.

막스가 제시한 공산주의 철학은 이렇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고 투쟁에 투신하는 것만이 가치있는 삶이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 그것도 아주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러니까 내가 발견한 역사적 혁명에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가치 있다.

이게 얼마나 시건방진가?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막스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을 추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청산 대상이 된다. 공산당선언 곳곳에 폭력, 폭동, 혁명과 같은 폭압적이고 피냄새가 진동하는 용어가 등장하는 이유도, 빌어먹을 내가 세상의 진리를 발견했는데 니들이 뭔데 반대해? 라는 심리다.

의외로 공산당선언에는 맞는 말도 많다. 근데 명제는 맞는데 그 명제로부터 도출되는 해결책은 정태적이고 나이브하다. 예를 들어 '생산품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가 부르주아지를 전 세계로 내몬다'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막스는 이 말을 하면서, 부르주아지가 세계를 착취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일까?

나이키는 아프리카 아동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축구공을 만들었었다. 그래서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았고 나이키는 아프리카 공장을 철수시켰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나이키 공장에서 그나마 축구공을 만들어 수입을 얻던 아이들은 아동 매춘과 구걸에 내몰리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도록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그러나 '자생적'이란 말은 어느 수준까지의 시간적 축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하라 이남이 왜 이렇게 가난할까? 사람들의 수준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부는 그 국민들의 수준만큼 부패와 폭력에 물들어 있다.

나이키에서 아프리카의 노동력을 이용해 공장을 운영한다면, 그것은 마치 산업혁명 초기 단계의 영국처럼 처참할 것이다. 그러나 영국만큼 긴 기간동안 이어지진 않는데, 이미 전세계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인권침해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처참한 기간은 짧아진다.

그러나 그 기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아프리카는 자본주의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일정 수준에 대한 배움에 도달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누가 행정을 할거며, 재정을 할거며, 경영을 할거며, 생산을 하고 판매를 할 수 있을까?

나이키에서 아프리카 공장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축구공 뿐만 아니라 운동화, 옷 등의 생산이 늘어나게 되고 이를 통해 아프리카는 자력으로 운동화와 옷을 생산할 수 있는 노하우를 쌓게 되는 것이다. 50년대 일본이 그랬고 60~70년대 한국이 그랬으며 90년대 중국이 그랬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겉으로 드러난 고통에 우리가 싸구려 동정심을 내세운다면 결국 아프리카는 늘 아프리카일 수 밖에 없다. 착취처럼 보이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근대화로 가는 길이 습득되고 이를 통해 민주화의 길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역사의 모순이라 부르며, 역사의 모순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 앞에 겸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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